매거진 창고

가진 적 없는 기억

by 하루오

소문이 파다한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내 경기를 본 사람이면 뇌신(雷神) 강림을 의심치 않았다. 4전 4승 4KO, 모두 1라운드에서 끝났다. 상대가 레프트를 뻗었을 때, 카운터가 번쩍였다. 아직 라이트를 쓰지 않을 때였다.


마, 니는 은제 내한테 짬삐온 벨트 갖다 줄끼가?


관장은 없는 돈을 털어 내게 삼겹살이나 삼계탕을 먹였다. 당신 체육관에서 챔피언 만드는 것이 평생소원이었다며, 고기에는 손대지 않고 소주만 홀짝였다. 나는 아버지나 다름없는 관장의 소박한 소원을 듣는 것이 좋았다. 네 게임 만에 국내 랭킹 8위에 올라 선 날, 내 꿈은 국내를 벗어나 있었다.




과거는 몸에 새겨졌다. 거울만 보면 셰도우 복싱을 해댔다. 배달 중에 엘리베이터를 탈 때면 거울 속 나를 향해 레프트를 뻗었다. 방금도 습관대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열쇠를 반쯤 돌려야 시동이 걸리는 오토바이도 그대로였고, 배달원에게도 꼬박꼬박 인사해주는 경비원 할아버지도 그대로였는데, 주먹 끝에 사람 살에 닿는 타격감이 느껴졌다. 어리둥절할 새도 없었다. 거울 속의 내가 주저앉았다.


그때 다운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챔피언의 펀치력은 비상식적이었다. 얼굴을 스칠 때 벌떼가 치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카운터의 순간 나는 0.3초쯤 주춤했고, 눈을 떴을 때는 게임이 끝나 있었다. 그날 이후, 상대의 품으로 파고드는 일이 두려워졌다. 펀치 아이를 극복하려고 내 다운 장면을 몇 번이고 다시 봤지만 나는 끝내 카운터를 쓸 수 없었다. 2연패를 더한 후 은퇴했다.


내가 비치지 않는 거울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눈에 속눈썹이 들어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니 난감한 것과 신기한 일은 별개였다.


현재도 몸에 새겨졌다. 하긴 복싱을 한 시간보다 배달을 한 시간이 더 많아졌다. 엘리베이터가 12층에 도착하자 1203호 벨을 누르고, 식사가 왔다고 알리고, 문이 열렸을 때 현관으로 들어가 단무지, 군만두, 짬뽕 순으로 음식을 내주고, 돈을 받고 돌아섰다.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자각 없이 자동적이었다.


저기요.


주인이 불러 세웠다. 그때서야 정신이 들었다. 내 또래의 사내는 체격은 나만 했지만 훨씬 단단해 보였다. 내가 물감을 유별나게 아낀 수채화라면 그는 유화였다. 반팔, 반바지 밖으로 드러난 팔뚝과 종아리에 알이 꽉 찼다. 굵은 핏줄이 뱀처럼 팔뚝 근육을 휘감았다. 심하게 부은 두 눈두덩에 파묻힌 눈빛이 강강했다. 나는 기가 죽었다.

짬뽕에 군만두면 9,000원 아니에요? 거스름돈 안 주셨는데요?

아, 아!

됐어요. 그냥 가세요. 수고하셨어요.

아, 죄, 감사합니다.

나는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이런 일은 없었는데, 배달에서도 나는 프로가 못되는가,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라진 거울상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유리창이나 승용차 본네트에도 나는 비치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긴 하지만 심각한 일은 아닌 듯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거울을 나란히 보던 사람은 내 거울상이 없는 것을 보면서도 별 반응이 없었다.


인스타그램에서도 조용했다. 은퇴 이후 복싱 관계자들과 연을 끊고 살았다. 친구라고 해봐야 취미삼아 복싱을 배우다가 사람 때리는 게 영 불편하다며 트레이너로 전향한 녀석뿐이었다. 녀석과는 요즘에도 토요일마다 PC방에서 밤을 샜다. 서로의 인스타그램의 몇 안 되는 팔로워였다. 그러나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녀석은 말이 없었다. 전화를 해보니 없는 번호라고 했다.


이상한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급기야 퇴근 즘에는 내 인스타그램까지 해킹당했다. 최근 올라온 사진은 짬뽕과 군만두였다. ‘승리 다음 날의 만찬’을 태그로 걸었다. 사진을 확대해 보니 젓가락 포장지에 우리 가게 상호가 찍혀 있었다. 그 이전 사진들을 역순으로 훑었다. 그는 어제 페더급 5차 방어전을 성공하고 국내 타이틀을 반납했다. 다음 사진에는 그가 관장을 무등태우고 트레이너가 된 녀석이 그의 한쪽 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로그아웃과 로그인을 반복했지만 계정 주인은 여전히 그였다. 그는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나였다.




밖에서 올려다본 1203호는 불이 켜져 있었다. 경기 직전보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를 찾아가서 뭐라고 한단 말인가? 나는 또 망설이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할 말이 없었지만, 가는 수밖에 없었다. 담배 세 개비를 태우고서야 발을 뗄 수 있었다.


뭡니까?

문이 열리며 그가 얼굴을 내민다. 불쾌함과 무관심을 적절한 예의로 포장했지만 위압적인 기운이 숨겨지지 않는다. 하루 사이 얼굴의 붓기가 꽤 가라앉았다. 막상 그를 보니 명치에 훅을 맞은 것처럼 숨이 턱 막힌다. 주먹이 쥐었다 펴지는 속도가 빨라진다.


뭐죠?

나는 그를 알아보는데 그는 나를 전혀 모르는 눈치다. 예상치 못한 눈싸움이 이어진다. 나는 경직된 채로 팽팽해지며 점점 얇아지는 것 같다. 그는 태연하다 못해 시무룩하다. 그러다 더 이상 한심해질 수 없는 것을 바라보는 듯 일그러진다. 나는 왠지 그의 앞에 무릎이라도 꿇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거실 쪽에서 사람 소리 하나가 다가온다.


지우야.

관장이다. 그가 대답하려는 순간, 나는 그의 턱을 향해 주먹을 날린다. 섀도복싱 때처럼 좋은 리듬이다. 그러나 상대는 3년을 복싱 선수로 살아온 국내 챔피언이다. 그의 카운터가 내 얼굴에 먼저 닿는다. 와장창 같기도 하고 콰광 같기도 한 소리로 귀가 멍멍해진다. 불이 꺼졌다가 켜지기를 반복하는 듯 사위가 번쩍거린다. 원…… 투…… 쓰리……, 빛이 눈에 익지 않는다. 새하얀 시야 너머로 그와 관장과 녀석이 수 십, 수 백 개로 박살난다. 포…… 뭔가 잘못 된 것 같은데 뭐가 뭔지 모르겠다. 파이브…… 산산이 부서진 내가 바닥으로 쏟아져 내린다. 어둠이다. 태어나선 안 될 평온이다.


거 뭐꼬?

아무 것도 아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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