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No : 노인과 바다
무기력해질 때면 『노인과 바다』를 약처럼 복용한다. 노인은 치열하게 ‘어부가 어부했’다. 자신을 행위로 설명하는 단순함을 보고 나면 내 마음 속에도 열정의 불씨가 켜진다. 예전만큼 타오르지 않지만, 뭔가를 해볼 기분은 든다. 약효가 썩 오래 가지는 않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나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졌다. 나는 멕시코만 어느 해안가의 늙은 어부보다 더 나이 먹은 것 같다.
차라리 하룻강아지 시절이 나았다. 1998년 리바이스 청바지 광고의 ‘난 나야!’는 하룻강아지들의 정언명령이었다. 10대의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패하더라도 뭐라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내가 나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밤새 게임하는 것도, 밤새 시험공부를 하는 것도 나의 일이었고, 나는 나였다.
‘나는 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다만 20대 초까지는 나의 고유성 자체에서 자존감의 터를 닦고 그 위에 소소한 성과로 자부심을 쌓아 올렸기에 ‘나는 나’에는 비밀을 움켜쥔 보물 같은 모호함이 있었지만, 지금은 나의 고유성이란 이런저런 직함들의 총합과 연봉으로만 적나라하게 설명되기에 정작 ‘나’는 희끄무레해졌다. 직함들 사이에서 ‘나’는 ‘아…… 씨발’, ‘하기 싫다’, ‘쉬고 싶다’ 정도의 불평-불만으로 인지될 뿐이다.
밥벌이 시장에 뛰어든 이후로는 자기주장을 하기 힘들다. 시장은 개인의 개별성이 아니라 직함의 설명서에 적힌 기능을 원한다. 이 시장에서 쫓겨나면 굶으므로 내가 살기 위해 나를 죽이는 역설이 발생한다. 취업이 힘들어질수록 자기 학살은 점점 더 심해진다. 서점가에 ‘나로 살아가기’의 느낌을 주는 책들이 인스턴트 라면처럼 출시되는 것도 ‘나’가 ‘나’로 살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내가 나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하룻강아지 같은 용기다. 우리는 취업 이전부터 실패를 너무 많이 경험했다. 간신히 괜찮은 밥벌이를 찾는 것은 소수고, 그들 역시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이 악물어야 한다. 부모님 세대처럼 ‘여기 아니면 밥 벌어 먹을 때 없을까봐!’, 당당하기 힘들다. 한 번 밀려나면 영원히 변변치 않은 직함과 더 변변치 않은 연봉에 갇혀 살아야 한다. 이를 너무 잘 알기에 하룻강아지가 될 수 없다.
덤벼라 세상아, 하던 때, 설익은 대로 내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인생이 나를 한 방에 초토화 시킬 수 있는 폭탄을 겨누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내 꼬리는 자꾸 말린다. 지금의 나는 나는커녕 누구도 아니고 ‘무엇’으로 굳어져 가는 것 같다. 몇 가지 취향만 남아 간신히 내 흔적을 유지한다. 떡볶이 따위로 자위할 문제가 아니다.
2. Yes : 고독한 늑대들의 사회
싸움을 피해야 하는 대상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미친놈이고, 다른 하나는 잃을 게 없는 사람이다. 설령 내가 힘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해도 가능하면 이들을 피해야 한다. 이들의 분노에는 제한선이 없어서 어떻게 나올지 예측하기 힘들다. 그래서 나는 저출산이 무섭다. 아이가 없는 성인은 범 같은 힘을 가진 하룻강아지다.
범 같은 힘의 원천은 사랑하는 것의 부재다. 사랑은 행복의 궁극이자 최고의 약점이다. 드라마 [펜트하우스]는 욕망뿐인 인간쓰레기들이 뒤엉킨 지옥도를 그리는데, 이 악귀들조차 자식은 대체불가의 약점이었다. 이들은 자식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지만, 자식 때문에 무엇이든 포기한다. 현실에서는 자식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것이 법에 의해 적정 수준에서 통제되므로 자식은 부모의 악행 잠금장치 역할을 한다.
자식이 없는 것은 ‘사회적 경험이 적고 얕은 지식만을 가진 어린 사람’이라는 하룻강아지의 사전적 의미에 들어맞는다. 자식이 없는 한 기러기 아빠나 미혼모를 자처하는 결단을 이해할 수 없다. 내 아이가 귀하기에 남의 아이가 귀해지는 사랑의 확장도 경험할 수 없다. 자식은 자기희생이 합리성이 되는 마법이자 숙명이다. 자식으로 인해 사회 구성원들의 연대는 아래위로 긴밀해진다.
이걸 모르는 하룻강아지들은 ‘나’를 내세우며 결혼과 출산을 조롱한다. ‘난 소중하니까’에 익숙해진 세대에게는 자식이 주는 행복감은 계산되지 않으므로 희생만 두드러진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들은 의무감으로 우리를 사랑한 게 아니다. 누구도 의무 때문에 자기 파괴적으로까지 보이는 희생을 자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희생에서 파생되는 고통보다 쾌락이 더 크기 때문이라고 추측하는 게 타당하다.
‘나’뿐인 사람은 사회화가 덜 될 수밖에 없다. 법은 지키되 관용이나 박애는 메마른다. 개인화 된 인간은 ‘선’을 이야기한다. 넘지 말아야 하고, 넘었을 때 어떠한 응징도 허용된다는 식이다. 사이다패스가 대중의 기호로 떠오른 것이 썩 아름답지는 않다.
벽간 소음에 시달려 두어 달 수면제를 타 먹던 적이 있었다. 그곳에 있다가는 내가 옆집 사람을 죽여 버리거나 옆집을 불태울 것 같았다. 분노의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당시 일도 안 풀려 답답했고, 잠까지 제대로 못 자니 하루하루가 막막했다. 잠자리를 뒤척일 때 너 하나 죽이고 가는 인생이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내가 선을 넘기 직전 옆집이 이사를 나간 덕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두어 달 간 품었던 마음의 황량함을 나는 안다. 이런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는 무섭다.
그리고 칼부림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