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Yes : 인종 구별 주의
나는 다문화를 경계한다. 다문화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다문화가 절대 가치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책임하다. 인류애로 세공한 도덕을 자기 인격의 액세서리로 활용할 뿐 현실적 대안은 제시하지 못한다. 이들은 인간을 오해하고 있다. 인간은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태어나기 위해 우리는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다. 우연히 한국, 네팔, 프랑스, 콩고, 칠레, 미국에서 태어났을 뿐이다. 국적이나 민족은 우연이지만 인간은 필연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인간을 동등하게 대해야 하는 것은 필연이라는 주장은 아름다운 소리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유유상종을 겉돌며 허공으로 흩어질 뿐이다.
동질적인 것과의 응집은 본능이다. 야생에서 동질의 무리 속에서 이질성을 경계했을 때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 생존 본능은 유전자에 각인되어 팔은 안으로 굽는다. 피험자들에게 클레와 칸딘스키의 그림을 보여주고 각각의 취향에 따라 무리를 나눈 후, 실험자가 무작위로 두 명을 뽑아 일정한 점수를 배분하는 실험이 있었다. 취향과 실험은 아무 상관관계가 없고, 피험자들 역시 이해관계가 없었는데도 사람들은 자기 무리에게 더 많은 점수를 주었다.
혈통적 민족주의는 허구다. 그러나 혈통적 민족주의의 동질감의 연대는 국민을 내적으로 응집시킨다. 태안 기름 유출 사건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 봉사를 자청한 것은 높은 시민성이라기보다는 ‘우리 땅’에서 발생한 ‘우리 일’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수평적 국가와 수직적 조국의 교차점에 서 있다. 식민 지배에 저항한 힘은 국민성이 아니라 민족성에서 비롯되었다. 국가뿐인 미국이 식민 지배를 받게 된다면, 우리 수준의 저항은 없을 것이다. 국가는 새로 만들면 그뿐이다. 구성원 간 연대감으로 사회적 신뢰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려주는 동질성의 응결핵을 굳이 배척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물론 세계화 이후 다문화는 시대 정의가 되었다. 결혼 이주 여성과 이주 노동자의 증가로 한국도 다문화 시대를 맞은 것도 사실이다. 다문화 가정의 자식들이 투표권을 가지고 군대도 다녀왔다. 이들은 ‘우리’로 받아들이지 않을 논리가 없다.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국밥에 김치로 한 끼를 해치우며, 아리랑의 정서에 공명하는 사람은 한국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다문화의 샐러드볼 모델은 거부한다. 샐러드볼 모델은 샐러드 재료들이 샐러드볼 안에 재료 고유성을 지닌 채 공존하는 것처럼, 다양한 문화가 한 국가 내에서 대등한 관계를 맺고 공존하는 것이다. 이 모델의 실패는 유럽에서 드러났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 같은 위기 상황에서 다문화의 얕은 신뢰가 얼마나 쉽게 깨지는지는 각국에서 발생한 인종차별로 증명되었다.
이것이 다른 문화를 배척하자는 뜻은 아니다. 은메달을 존중하듯이 다른 문화도 존중한다. 다만 은메달과 금메달을 동급 취급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서 지나치게 어긋나므로 인류애 판타지는 참아 달라는 것이다. 은메달의 연장선이라면 샐러드볼 모델도 인정될 수 있다. 1:9든 3:7이든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핵심은 동일하다. 그들은 소수여야 한다. 우리가 다수일 때, 소수와 공생하지는 못해도 공존할 수 있다. 손님을 존중한다고 해서 안방을 내줄 수는 없다.
물론 우리는 공생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다문화 교육도 필요하다. 본능뿐인 인간 군집은 동물 무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자연적으로 발현되는 본능을 상쇄시키기 위해서라도 다문화 교육과 제도적 뒷받침은 우선되어야 한다. 단, 공생은 용광로 형태를 띨 것이다. 이산화탄소의 핵심은 탄소이고, 황화철의 핵심은 철이듯, 우리 중심에서 다양성이 융합될 때, 우리는 우리이자 다문화로 안정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외국인들이 출연해 주제를 정해 토론하는 [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무슬림 대표 출연자가 독일에서 겪는 차별을 이야기하자 독일 출연자는 말했다. “우리는 벌써 이슬람 문화를 많이 받아 들였다. 그런데도 차별을 느낀다면, 자기 나라로 가면 된다.” - 문화가 충돌할 때, 가재가 게 편이 아니기는 힘들다. 단, 한국어를 할 줄 안다면, 일단 안녕하세요.
2. No : 송사리를 인정한 가재의 비극
어렸을 때, 여자 친구들과의 말다툼은 어이없는 데서 비롯되기도 했다. 그녀들이 일상에서 겪은 갈등을 이야기할 때, 나는 상황을 분석했다. 간혹 여자 친구의 잘못 때문에 발생한 일임을 지적하거나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시야를 넓혀 보라고 조언하면, 여자 친구는 자기편이 되어주지 않은 것에 섭섭함을 토로했다. 나는 편 가르기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따진 것뿐이라고 변명이 될 수 없는 변명을 했지만, 그때는 이미 불에 기름이 끼얹어진 상태였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어?”가 나오면 게임은 끝났다. 좋은 게 좋은 거라 내가 사과하고 말지만, 내가 맞는데 내가 사과해야 하는 상황이 늘 답답했다. 실제로 게를 편들어 주지 못한 것에서 시발해 헤어진 적도 있었다.
덕분에 지금은 친구들이나 학생들이 억울하게 당한 일이나 고민을 이야기하면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는 쪽으로 사회화 되었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자발적으로 자백 류의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들은 대체로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거나 답을 알고 있다. 거기다 대고 입 바른 소리 해 봐야 서로 감정만 상한다. 그럴 때는 내가 감정의 쓰레기통이 된 것 같지만 별 수 없다. 그래서 나 또한 이렇게 쓰레기를 배출한다.
미진아, 그때 네가 친구 코트 빌렸다가 단추 두 개, 아니다. 말을 말자. 그래도 지구는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