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No : 자유의 가격
내 스마트폰은 샤오미다. 1년 쓰고 버려도 괜찮다는 각오로 도전했다가 고장 한 번 없이 3년을 넘겼다. 요즘은 하루에 한 번은 충전해야 해서 연말쯤에는 바꿀 생각이다. 이 글을 쓴 시점에서 시간이 지나 실제로 나는 또 샤오미를 구매했다. 내 필요를 가장 저렴하고 확실하게 충족시켜 준다. 갤럭시나 애플을 사야 하는 이유는 편견 혹은 허영뿐이다. 편견과 허영이 삶을 무겁게 만든다.
싼 게 비지떡인 시대는 갔다. 28년 전, 매직스테이션 컴퓨터를 살 때만 해도 200만 원 안팎을 줬었다. 지금은 절반도 안 되는 가격으로 비교도 안 되는 성능의 컴퓨터를 살 수 있다. 무어의 법칙에 따라 적정 기술은 저렴해지고 고급화 된다. 고가의 스마트폰에 장착된 첨단 기술은 놀랍지만, 놀랍게도, 필요한 기능은 아니다.
편리와 필요의 경계를 나누는 것은 애매하다.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편리한 것이었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편리를 바탕으로 사회 구조가 구축된 지금은 실질적 필수품이다. 자동차, 컴퓨터, 전자레인지도 같은 과정을 거쳤듯 첨단 기술의 편리가 적정 기술의 필요로 변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조금만 늦게 이용하면 부작용까지 보완된 기술들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광고로 소비자를 광고라이팅(광고+가스라이팅)한다. 소비 대중은 대부분 이 진부화 전략에 걸려들어 사용 가치가 아니라 교환 가치로 상품을 판단한다. 나는 전화, 인터넷, 풍부한 배터리의 사용 가치가 필요했다. 그런 내게 브랜드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자전거를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페달을 굴려 가속하는 기기에 쇼바가 달려 충격을 감소시켜 주는 제품이면 충분했다. 운동이 목적이므로 프레임이 가볍거나 공기 저항을 덜 받을 필요도 없었다. 이 사용 가치는 십만 원 중반대면 충분했다.
교환 가치의 세계에서 상품은 값 비싸지고 나는 비지떡 벌레로 전락한다. 내가 샤오미 스마트폰을 샀다고 하자 동생은 돈 없느냐며 자기가 새로 사 주겠다고 했다. 자전거 앞뒤 타이어가 한꺼번에 터져서 아무나 가져가라는 심정으로 자전거를 자전거 주차장에 방치해 뒀는데도 3일간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그냥 수리해서 썼다. 비지떡은 줘도 갖지 않을 만큼 비루한 것들이었다.
오히려 내 입장에서는 굳이 특정 브랜드에 충성하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는다. 소득이 그만큼 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면서. 사용 가치의 이점이 그리 크지 않은데도, 고가를 지불하는 것은 비합리적이었다. 화장품이나 건강 보조 식품도 성능과 가격은 비례하지 않았다. 1점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입시판에서는 약간의 이점에도 프리미엄이 생길 수밖에 없지만 생필품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비지떡을 먹는 가장 큰 이점은 사용자를 자유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내 물건을 모시지 않는다. 일하기 얼마나 싫었는데, 그렇게 번 돈으로 고작 물건에 굽신거리다니. 나는 스마트폰은 아무 데나 던져두고, 자전거를 타다가 식당에 들어갈 때도 굳이 잠그지 않아도 마음이 놓인다. 자유보다 비싼 것은 사랑? 행복? 평화? 몇 개 없을 텐데, 최소한 신상, 특판, 한정 수량은 아니다. 상품을 모시는 제사장으로 자기 가치를 할인하여 얻은 자기만족이야말로 비루하다.
나도 교환 가치에 흔들릴 때가 있다. 옷이나 신발에는 뜬금없이 ‘지름신’이 강림하곤 하신다. 그렇게 구매한 것들은 깍듯하게 모셔진다. 모시다보니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사용할 때도 얼룩이라도 묻을까봐 조심스러워진다. 멋있지만 불편하다. 결국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5만원이 안 되는 트레인이복 상하 세트와 3만 원도 안 되는 조깅화다.
싸구려들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2. Yes : 비지떡 인간
내가 비지떡인 시절이 있었다. 나는 싸구려가 아니지만, 사회는 나를 싸구려 취급했다. 내 성능은 그대로인데, 아무도 나를 구매하지 않았다. 취준생 시절과 취업 공백기 사이의 일이었다. 도서관에 가던 길에 출근 시간 특유의 귀찮지만 조급한 걸음걸이들과 꽉 막힌 도로에 끼지 못하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내가 쓸모없는 인간임을 공식적으로 인증 받는 것 같았다.
나도 잘할 수 있는데, 비참하고 억울했다. - 이제는 사춘기처럼 청년들이 거치는 보편 감정일 것이다. 합격자와 불합격자 간의 점수 간극은 크지 않다. 그러나 인생의 간극은 극적으로 벌어진다. 한 사람의 일상은 ‘생활’로 살이 붙고, 다른 한 사람의 일상은 ‘생존’을 향한 투쟁으로 침식된다.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지인이 잘 풀린 소식을 듣게 되면 이미 가난한 자존감은 뼈마디가 부서진다. -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뭘.
취업으로 싸구려가 된 기분을 벗어나는 사람은 대기업이나 공기업, 전문직에 종사하게 된 상위 10% 정도다. 2021년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25-29세 고용률은 67.6%로 셋 중 하나는 백수다. 이 연령대 평균 임금은 258만 3천 원이지만, 상위 그룹의 임금이 높아서 중위 소득은 더 낮아진다. 자신이 일한 만큼 대우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 돈이라도 벌어야 살 수 있으므로 다들 이름을 버리고 직함을 연기한다. 일을 하면서도 –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뭘.
자본주의가 구축한 숫자의 세계에서 우리는 연봉만큼의 인간이다. 탑급도 아닌 연예인이 전업 주부 아내 차 리스비로만 월 300만 원 이상씩 쓴다는 말이나, 스포츠 선수들이나 유튜버들의 억 소리 나는 연봉을 들으면 비지떡에 준하는 자존감은 기어이 피떡이 되고 만다. 사용 가치로 나를 판단하자는 외침은 노인의 자위처럼 가련하다. 비지떡이어서 싼 게 아니라 싸면 비지떡인 것이다.
통장이 인격을 형성하고 삶을 증명하기에 나 또한 절반의 비지떡 인간이다. 아니, 피지떡이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