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세일러문
[세일러문]은 청소년용 그라비아였다. 미소녀 캐릭터들이 치마를 짧게 줄인 교복을 입고 등장했다. 이들은 적과 싸우기 전 실루엣으로 몸 선을 드러내며 변신하고(웨딩피치나 천사소녀 네티도 그랬다), 섹시한 포즈를 취하면서 새끼 고양이처럼 앙칼지지만 귀엽게 외쳤다. -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그녀들이 어떻게 불의를 용서하지 않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KBS에서 방영할 당시 학원 시간 때문에 앞부분만 조금씩 봤을 뿐이었다. 지금은 대략적인 줄거리나 등장인물도 가물가물 하지만, 세일러문의 귀여운 선전포고의 억양과 음색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도 불의를 용서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고 싶었다.
어렸을 때 보던 만화들은 선악 구분이 뚜렷했다. 악은 지구를 침략해서 인류를 파괴했고, 무엇보다도 못생겼다. 그들을 죽여 없애거나 지구에서 쫓아내는 것은 도덕적이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며 현실에 뿌리내릴수록 어렸을 때의 정의감은 쓸모없어졌다. 인간관계에서 선악 구분은 만화만큼 명징하지 못했다. 갈등들은 각자의 사정을 호소했고, 호소와 호소는 각자의 맥락 속에서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닌 채로 뒤엉켰다. 가해자의 안쪽에는 피해자가 있고, 피해자의 안쪽에는 다시 가해자가 있었다. 참과 거짓의 경계가 뭉개지며 각자의 감정이 육즙처럼 흘러내렸다. 계산할 수 없는 감정들 때문에 사회는 정의보다는 선(善)을 선호했다.
정의는 악을 가차 없이 응징하지만, 선은 너그럽게 용서한다. 선은 용서가 최고의 복수라는 헛소리를 혁명적으로 해대며 세상 고상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이 부모님이나 연인의 복수를 위해 악당을 해하려 할 때, ‘죽은 그 사람들이 복수를 원할까?’ 때문에 칼끝들을 돌렸다. 아마도 을이나 피해자의 경험이 누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구마도 그런 고구마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개작두’가 마려웠다.
이음동의어로 ‘암행어사 출두요’가 있지만, 개작두만 못하다. 기껏해야 탐관오리를 두들겨 패거나 귀양을 보내는 정도지 역적이 아닌 한 사약을 내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반면 직접 목을 베어버리는 ‘개작두를 대령하라!’야말로 칠성 사이다다. 아직 아동티가 남은 중학생들에게 금요일 밤의 단순 명징한 사이다는 세일러문보다 섹시했다. - 포청천 형님, 형님의 사자후가 그립읍니다.
세일러문처럼 판관 포청천이 어떤 불의를 어떻게 응징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KBS에서 방영할 당시 학원 마치고 와서 여유 있게 감상했지만, 무공 실력이 뛰어난 조사관 전조 외에 대략적인 에피소드나 등장인물도 기억나지 않는다. 전조, 마한, 장용, 조호는 전조 아랫 계급의 조사관들로 기억하는데, 오프닝 노래 덕분에 이름만 기억할 뿐이다.
포청천은 이마에 초승달이 박힌 까무잡잡한 뚱땡이 아저씨였다. 단순히 풍채가 좋았을 수도 있지만 중년의 뱃살이 넉넉한 것으로 기억된다. 까만 바탕에 이런저런 금박 수가 놓인 관복을 입은 것도 기억난다. ‘개작두를 대령하라!’의 억양과 음색은 세일러문의 그것처럼 아직도 생생하다. 포청천을 방송한 다음 날이면 교실 곳곳에서 ‘개작두’를 요청했다.
지금도 특정 뉴스 기사에 개작두와 결이 같은 댓글에 추천이 주렁주렁 달린다. 사람들은 미성년자의 운전 미숙이나 음주운전으로 운전자와 탑승자가 죽으면, ‘자연사’나 ‘사람은 안 죽어서 다행이다’라고 안도하며 ‘삼가고인의 액션빔’을 날린다. 강력 범죄를 저지르고도 가해자가 낮은 형량을 받을 때, 촉법소년들이 법으로부터 범죄를 허락받을 때, 정당방위가 쌍방으로 몰릴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개작두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을 것이다.
범죄가 일어난 후, 법은 가해자 편이 된다. 이미 일어난 피해는 어쩔 수 없으니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가해자의 피해는 막아야 하는 사명을 띤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대중의 법 감정은 반영되지 않는다. 법은 인간을 감정 없는 기계쯤으로 여기고, 슬픔, 허탈, 공포, 분노를 부정하기에 급급하다. 내 집에 들어온 강도를 때려죽인 게 왜 쌍방폭행을 너머 내 잘못인지 모르겠다. 내 아이가 왕따 당해서 가해자를 강제 전학 시켰더니 가해자가 내 아이 학교까지 찾아와 내 아이를 구타했다면, 내가 가해자를 전치 8주 정도로 구타하는 것은 정당방위다. 나아가 욱일기를 입은 사람을 길거리에서 집단 구타하는 것은 뜨거운 애국심이고, 내 어머니를 죽인 사람을 내 손으로 죽이는 것은 아름다운 인륜이다. 단, 이런 사적 제재는 복수의 연쇄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가 공적으로 제재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법 적용은 가해자 보호에 급급해 피해자의 사적 제재 욕구를 부추긴다.
물론, 정의와 악은 다른 얼굴을 한 같은 몸이므로 위험하다. 정의는 필연적으로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내게 정의를 수호할 권한이 주어진다면, 코로나 시국에 대형 교회에서 대면 예배를 강행할 때 입구를 막고 불질러버렸을 것이다. 클럽이나 술집도 마찬가지다. 마스크 안 쓰고 떠들어대는 사람, 양성판정 받고서 의료진에게 침 뱉는 사람은 도끼로 골통을 박살내어도 무죄다. 사람이면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어야 사람이므로 해충 퇴치는 유익하다. 그러나 이런 행태는 나치와 다를 바 없다. 내가 바라는 정의는 악과 너무 가깝거나 언제 악으로 변질될지 모른다.
실제로 나치의 기미도 보인다. 선(善) 없는 정의는 거침없이 선(線)을 넘는다. 유명인이 어떤 잘못을 하면, 사람들에 의해 그는 자신의 잘못만으로 전인격을 구성하게 되어 인터넷 속에서는 인격 살해당한다. 실제로 자살한 사람도 생겼다. 그쯤 되면 정의는 분노 분출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 같다.
이는 정의의 크기 문제일 뿐이다. 법은 선에서 정의로 방향을 선회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마동석이나 강호동이 ‘예절 주입기’라는 우스갯소리는 사람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온다는 통념을 반영한다. 강약약강, 그게 보통의 인간이고, 보통의 인간에게 보통의 정의가 필요하다. 지금의 법은 크게 두려운 대상이 아니다. 특히 화이트컬러 범죄는 보다 광범위한 피해를 입히는 데도 그 피해가 눈에 직접 보이지 않아서 가볍게 다뤄진다.
정의는 시대의 요구다. 2013년 일반 대중이 읽기 벅찬『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2018년에는 촛불혁명을 이뤘다. 진격해온 90년대생들은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묻는다. 개작두에 대한 기갈이 깊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판관 포청천들은 카르텔을 깰 생각은 없어 보인다. 개작두, 개작두, 개작두! 아주 크고 많은 개작두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