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는다

(경험에 관하여)

by 하루오

1. Yes(1) : 평생소원이 누룽지


예상 외로 수입이 넉넉했던 해, 나를 위한 사치라고는 치킨 몇 마리 더 먹은 것이 고작이었다. 치킨을 좋아했다기보다는 맛있는 게 먹고 싶지만 뭘 먹고 싶은지 모를 때 그냥 치킨을 주문했다. 치킨을 먹으면서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은 치킨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튼 나를 위해 돈을 썼다’는 사실로 식욕을 얼렁뚱땅 해치웠다.


돌이켜 보면 다양한 음식을 먹어 본 경험이 제한적이었다. 어렸을 때는 돈이 없었고, 돈이 있을 때는 같이 먹을 사람이 없었다. 맛집 탐방의 의의는 ‘맛’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맛있는 것을 먹는 경험의 공유’에 있다. 사람과 함께 하는 끼니가 명절 포함해도 스무 끼가 안 되는 내게 맛집에 갈 기회조차 드물었다. 혼밥이라는 용어가 대중화되기 전부터 파스타 도 혼자 먹으러 다녔으니 식당에 혼자 가는 것은 부담 없었지만, 이제는 귀찮았다. 가끔 동네 돈가스, 짬뽕, 냉면, 라멘, 국밥집을 들리는 것이 내 맛 경험의 테두리였다. 내 맛의 영역에서 치킨은 가장 비쌌다.



2. Yes(2) : 소소한 장인들


지하철역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미용실은 5개가 넘었다. 골목으로 조금만 빠져도 개수는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내 머리는 길어졌다 짧아졌다 할 뿐이므로 미용실 선택 기준은 요금이었다. 그러나 모든 미용실의 요금은 동일해서 가까운 미용실에 갔다.


미용사는 늘 어떻게 자를지 물었고, 나는 매번 짧게 잘라 달라고 대답했다. 미용이 끝나고 나면 미용사는 괜찮으냐고 물었고, 나는 거울을 보는 척하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차피 스타일링 할 줄도 몰랐으니 미용실 다녀온 티가 나는 머리 길이면 충분했다. 어떻게 잘랐든 이미 잘라버린 것은 어쩔 수 없기도 했으니, 싫은 소리 할 이유도 없었다.


새 미용실이 오픈하며 할인 행사를 했다. 당연히 그쪽으로 갔다. 50 줄의 원장님 혼자 운영하는 작은 미용실이었다. 이번에도 미용 시작 전과 직후에 옛날 영어 교과서 다이얼로그 같은 무의미한 문답을 나누고 집으로 왔다. 다음 날, 새로운 경험을 했다. 머리모양이 괜찮았다. 예전에는 미용사가 드라이를 해주어서 당일은 괜찮아도 다음 날이면 미묘하게 어긋났다. 그러나 새 미용실 원장님은 내가 드라이하지 않는 것을 알고 그에 맞게 잘라준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그 집을 단골로 삼았음은 물론, 인쇄소든, 음식점이든 오래된 가게를 우선 선택했다. 시간을 거쳐 온 것들은 노화된 것이 아니라 노련해진 것이다. 간혹 구시대에 멈춰 경직된 사람들도 있지만, 시간을 버틴 경력은 능숙한 경우가 많았다. 능숙함으로 익어가는 사람들의 주름살에서 예쁨을 본다.

고기도먹어본놈이잘먹는다.jpg 어떻게 잘라드릴까요? - 짧게요.


3. No : 경험의 감옥


모이를 주는 주인 손의 경험을 신뢰하는 닭은 주인에게 가장 먼저 목이 비틀릴 것이다. 만약 그 닭이 죽기 전에 모이를 성공적으로 얻어먹는 방법에 관한 책을 썼다면, 닭의 세계에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은 기록되지 않으므로 그의 방법은 성공 지침서가 될 것이다. 많은 닭들이 그를 벤치마킹해 일찍 죽고 나면, 결국 가장 성공한 닭은 모이를 덜 먹어 살이 덜 찐 닭이다.


자기개발서 한두 권 정도는 읽을 수도 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슬럼프에 빠졌을 때, 의욕은 있으나 의욕에 불을 지필 방법을 모를 때, 벤치마킹은 유용한 전략이다. 그러나 자기개발서 위주로 독서하는 사람은 가벼워 보인다. 타인의 경험에 의존하는 것은 비주체적이며, 두꺼운 설명서를 읽는 것은 독서가 아니다. 설명서를 읽은 후의 흉내는 어색하기 마련이다.


타인의 성공 경험을 무조건 신뢰할 수는 없다. 성공담은 사후적으로 조직되기 때문에 성공 요인들 간의 인과관계가 정확하지 못하다. 아침형 인간이든 올빼미형 인간이든 그것이 성공과 직결되는 생활 습관임을 증명하기는 힘들다. 다만 성공했기 때문에 그 습관이 유의미하게 해석될 뿐이다. 성공의 영광을 노력에게 돌리느라 운이 간과된다. 동일한 노력을 동일한 방법으로 쏟아 부은 사람이 실패하기도 한다.


자신의 경험 역시 무조건 신뢰할 수 없다. 인간의 기억은 객관적이지 않다. 자신의 감정에 따라 경험적 사실은 왜곡되기 마련이다. 일주일간의 휴가 내내 여유롭게 즐기다가 마지막 날 스마트폰을 잃어버린다면, 그 휴가는 고통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경험의 지속 시간과 기억은 일관성이 없다. 또한 성실한 인간은 이미 성실함에 적응해서 자신의 성실성을 객관적으로 측정하지 못한다. 습성은 잃어버렸을 때야 제대로 된 가치를 측정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경험에 의존하면 혁신이 힘들다. 인류의 혁신은 역사의 경험을 깨부수고 등장했다. 비틀즈의 음악과 조앤롤링의 [해리포터]는 여러 제작사에서 퇴짜를 맞았고, 현재 시총 3천조에 달하는 구글은 초기 기술 가치 17억 7천만 원도 거절당했다. 혁신은 과거라는 알을 깨고 나오는 새와 같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성장한 자신이다.


인간은 경험 속에서 산다. 경험에 갇혀 있을 것인지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 나갈 것인지는 자기 하기 나름이다. 고기를 먹어본 사람은 같은 방법으로 능숙해지겠지만, 고기를 안 먹어본 사람은 미숙할지 모르나 새로운 방법, 새로운 조미료, 새로운 술과 페어링을 선도할 수 있다. 경험 속에 있되 경험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주체성.


물론, 쉽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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