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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프레드릭 황경민

열 아흐레 부산 중앙동 영화체험박물관

by 박달나무

아름다운 구속에서 석방됐다. 진정 석방되기 싫은 곳이다. 올라갈 때 스쳐 지나간 파래소폭포를 내려가는 길에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나를 비롯해 대부분 한국 사람들이 나이아가라나 이과수, 빅토리아로 폭포를 접했기 때문에 내 땅에서 만나는 폭포가 시시하게 보인다.
언젠가 이름을 들은 기억이 아득한 파래소폭포는 물 떨어지는 높이가 상당하다. 폭포라는 놈이 오랜 세월 물의 흐름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지각변동에 의한 단층의 결과이다. 유수에 의한 침식이 돈오점수라면 폭포는 돈오돈수에 대응한다. 신불산이여~ 기억하리라. 돈오점수와 돈오돈수가 함께 어우러진 명산이로다. 그러고 보니 이름부터 남달랐다. 신(神). 불(佛). 산.
아이들과 해운대로 이동했다. 사실 해운대 같이 번화한 관광지를 선택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운대에 30년 된 콘도를 얻은 것은 부산에 꼭 가고 싶기 때문이다. 오늘 저녁에 황경민 시인의 출판기념 북콘서트에 참여하고 싶어서다.
50대에 접어든 황경민 시인을 알게 된 것은 5년 전이다. 학교 밖 중고등학생들과 땀 흘리던 시절, 한 지인으로부터 부산에 있는 인문학 카페 헤세이티에서 강좌가 있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누가 강의하는데 먼 부산까지 찾아가나 싶어 인터넷에서 정보를 뒤졌다. 강좌는 김영민 선생의 시리즈 철학 강의였고, 헤세이티는 작고 허름한 카페인데, 내가 정보를 찾을 때 이미 입간판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자기 블로그에 황경민 손글씨 입간판 사진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주옥이었다. 트위터처럼 제한된 글자로 세상을 그려내는 솜씨가 나로서는 전대미문이었다.
당시에 나는 텍스트의 죽음에 대해 천착하고 있었다. 빌렘 플루서(빌헤름 플루세르)의 저작에 심취해 있었고, 남미에서 유행한다는 미니 소설(A4 한쪽 이하의 소설)에 관심이 있었다. 결국 텍스트의 몰락이 탈역사 시대를 연다는 플루서의 주장과 그를 소개하는 진중권의 ‘전체의 대강’식 인터넷 강의를 링크를 걸며 여기저기 소개하고 있었다. 탈역사 시대가 곧 디지털 시대의 본질이라는 것, 기존의 권력이 해체되고 새로운 형태의 권력이 세워지며 교육제도는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일련의 흐름에 동조하고 내 얘기를 보태기도 했다. 아이들이 책을 멀리 하거나 똑똑한 녀석들이 독해력은 형편없는 현상을 탈텍스트 시대의 특징으로 설명했던 것이다.
황경민의 입간판은 달랐다. 매체는 분명 텍스트지만 읽는 이 입장에서는 이미지로 들어왔다. 따라서 읽는 이를 곧바로 보는 이로 만드는 것이다. 한 줄로 쓰는 격언이나 아포리즘도 아닌 것이 품고 있는 생각은 고전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을 아우르는데 그 뿌리는 한국의 민중 속에 박혀있다. “어떻게 이런 장르가 가능하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라디오로 듣다가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황경민을 좋아하게 됐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황경민 이름도 모르고 “헤세이티 카페의 입간판을 쓴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직접 헤세이티를 찾아갔고, 황경민을 알게 됐으며,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됐다. 나 말고도 그를 응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됐다. 이건 뭔 감정이지? 황경민의 헤세이티는 경영난을 늘 겪었고, 그는 아주 가끔 헤세이티를 유지하기 위한 고통의 감내를 페북에 털어놓기도 했다. 내가 책임지고 있는 대안학교가 존폐의 기로에 설 정도로 운영난이 심각할 때여서 그의 고통이 내 고통이기도 했다. 부모님 위패 앞에 목 놓아 우는 자식은 어미 아비 잃은 설움이 아니라 자신의 힘든 처지 때문에 우는 거라 하지 않는가. 꼭 그런 경우였다.
자주 무릎을 치게 만드는 입간판을 썼고, 2천 편이 넘어가자 여기저기서 책을 내라고 했다. 나도 같은 권유를 했지만 지나가는 말에 불과했다. 한 출판사와 약속까지 했다고 하길래 책이 곧 나오겠구나 했지만 그 후로도 소식이 없었다. 책 얘기가 나온 지 3년이 지나 황경민의 후배이자 걸출한 시인이자 출판인인 이순호 글상걸상출판사 대표의 땀내로 드디어 입간판 선집 <지금바로여기>가 나왔고, 출판기념 북콘서트를 연다고 하니 참석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이다.
북콘서트에 내가 있어도 없어도 다를 건 전혀 없지만 황경민을 응원하고 애정 하는 마음에 꼭 가고 싶었던 것. 사랑한다는 것이, 응원한다는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럴 때 얼굴 보고 서로 웃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장사꾼의 계산도 없는 건 아니다. 황경민의 목소리가 교육계에도 스며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존경하는 박동섭 선생님처럼 어린이 청소년을 만나는 사람들은 황경민을 만나야 한다. 직접 대면이든 책이든 그의 목소리가 교실에서 조금이라도 구현돼야 한다는 것이 내 소신이다.
콘도에 아이들을 남겨두고(물론 다른 선생님이 계시니까) 낯선 영화체험박물관을 구글의 힘을 빌어 찾았다. 끝나기 20분 전에나 도착했지만 다행히 황경민 시인의 노래 두 곡을 들었다. 9월 하순의 토요일을 감안하면 성시를 이룬 북콘서트다. 덕이 있는 사람은 수많은 사람들이 행사의 한 부분씩 맡아서 일이 성사되도록 만든다. 인형극단 박은희 대표는 밀양 공연으로 뒤풀이 식당에 뒤늦게 찾아왔는데 자신이 주문한 북콘서트 행사용 떡이 어땠는지부터 물었다. 첫 한마디와 그의 태도에서 내가 사랑하는 황경민 시인이 아주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그걸로 대만족. 뒤풀이 음식 맛나게 먹고 소주 2잔 마시고 일찍 일어나 아이들이 있는 해운대로 복귀했다. 겉으로는 늘 나를 비난하는 아이들이지만 몇 시간 안 봤다고 어미 만난 제비 새끼마냥 반기며 툴툴댄다. (2017.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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