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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다르게 발달한다

열 여드레 경남 울주군 상북면 등억알프스리 간월재

by 박달나무

3일째 신불산에 아름다운 구속을 당하고 있다. 날도 쾌청해서 아이들이 제대로 가을 공부를 한다. 갓 피어 하늘로 꼿꼿이 머리를 들고 있는 억새의 물결은 예상대로 장관이었다. 우리가 머무는 신불산자연휴양림 상단(上端)에서 간월재로 이어지는 임도가 잘 닦여있더다. 2.4km를 놀다가 장난치다가 걸으니 고갯마루에 닿았다. 간월재다.

해발 900미터 간월재에 오르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마치 산꼭대기에 오른 것처럼 사방팔방 파노라마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간월재에 10미터만 못 미친 상태에서는 알 수 없던 세상이다. 저 멀리 오른쪽으로 신불산 정상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이 억새밭 사이로 뱀이 지나는 것처럼 보인다. 왼쪽으로는 800미터만 오르면 간월산 정상이다. 재밌는 건 여기가 상북면 등억리였는데 2015년부터 등억알프스리로 리 명칭이 바뀌었단다. 등억리도 등어리 모양에서 온 말이라고. 등⟶등어리⟶등억리⟶등억알프스리 변화가 말의 기능을 보여준다. 말 자체가 변화를 품은 역동성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는 하이킹이나 트레킹이라면 강하게 거부하는 아이들도 막상 시리도록 푸른 하늘 아래, 땀도 안 나는 날씨에 산길을 걸으니까 마냥 좋은가 보다. 희희낙락이다. 아이들 발걸음이 그야말로 트와이스 노래 knock knock의 리듬이다. 아이들 마음에 노크를 해대는 하이킹이다.(아이들이 트와이스 노래에 맞춰 난타연습을 한 경험이 있다)

인솔하는 나도 기분 up이다.

“그래 맞아, 주 4일이나 주 3일 수업으로 가야 해. 허이구 옛날 주 6일 수업을 어찌 버텼을꼬”

이렇게 좋은 날, 이렇게 좋은 장소에 아무도 없다. 4시간 동안 등산객 딱 2팀 만났다. 아이들이 모두 교실에 갇혀있을 때 우리는 천국을 걸으려니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도대체 왜 아이들을 콘크리트 건물 안에 가둬 두냐고! 현행 제도를 잘 살려도 가을에는 가을로 교실을 옮기면 좋겠다.

한편으로 아무도 없는 산길이 다행이다 싶다. 우리 아이들의 엽기적인 모습은 언제나 구경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일단 ‘어, 이 시간에 아이들이 왜 여기 있지?’부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아이의 안위를 걱정한다든가, 엉엉 소리 내어 우는 아이를 보면 곁에 있는 나를 째려보는 어른도 꽤 있다.

오늘의 주인공은 1학년 막내가 됐다. 얘가 나무토막을 들고 나를 위협한다.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어깨나 엉덩이, 종아리를 가리지 않고 내려친다. 아프다기보다는 살갗이 무척 따갑다. 돌멩이도 들고 던질 듯이 자세를 잡는다. 설마 하는데 획 날아온다. 배에 맞았다. 먼저 든 생각은 ‘아니, 어린것이 이렇게 정확하게 던지다니…… 야구 투수로 키워볼까?’이었지만 곧 아픔을 느꼈다. 또 돌멩이를 던졌는데 이번에는 목 바로 아래 가슴으로 날아와서 손으로 잡았다. 각이 날카로운 돌이라 손바닥이 아프다.

“야! 그러는 거 아니야. 돌 던지면 어떡해. 돌에 맞으면 크게 다쳐. 너무 위험해”

큰소리로 나무라지만 아이는 싱글벙글이다. 이번에는 긴 막대기를 가져와서 내게 똥침을 하겠다고 엉덩이를 찔러댄다. 이게 다 형들에게 배운 것. 하지만 형들은 실제로 돌을 사람에게 던지거나 막대기로 내려치지 않는다.

1학년 아이가 나를 만난 지 2달 반 됐다. 일본 목장부터 한 달 이상 집을 떠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는데 전혀 엄마 얘기를 안 한다. 집에 가겠다고 안 한다. 형들이 있고, 응석을 받아주는 어른이 있고, 매일매일 변화하는 일상이 있기 때문이다. 형들이 돌을 던지니까 같이 돌을 던지는데(돌을 마음껏 던지는 게 처음이다), 사람에게 직접 던지면 안 된다는 걸 모른다. 진정 모를 뿐이다.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한편으론 갸우뚱하다. 형들에게는 던지지 않는다. 나에게만 던진다. 형들에게 다구리를 당한 경험(구박 수준)을 통해 학습한 것이다. 이제 어른에게도 잔소리를 들으며 학습이 쌓이면 된다. 아이가 실수하거나 실패하더라도 안전하게 돌봐 주는 역할이 앞서 거듭 얘기한 교육의 구조다. 아이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조건이나 돌을 던질 때 금기사항을 리스트로 만들어 암기하고 내면화하라고 닦달한다고 상상해보라. 그런 코미디가 없다.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콘텐츠가 교사에서 학생으로 향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막내가 내게 온 것은 다르게 발달하기 때문이다. 1학년 교실에서 아이는 4살 정도의 행동을 보였다. “싫어!” “안 돼!”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 성량으로 외치는 아이가 교실에 있을 수 없는 법이다. 보통은 4살 아이도 그러지 않지만…

의사가 아이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약을 먹이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면 아이는 ‘개선’될 겁니다. 투약을 하면서 계속 학교에 보내는 게 최선입니다. 한번 학교를 떠나면 복귀할 수 없어요.”

의사는 양심에 의해 소신껏 말했다는 걸 안다. 의사의 소신은 장애에 의해 발달이 정지되거나 왜곡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투약은 발달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은 아니지만 교실에서 문제가 되지 않도록 붙들어두는 효과가 있으니, 그 사이에 아이가 제대로 발달하도록 유도하자는 주장이다. 이 주장이 불순한 의도가 있는 건 아니다. 흔히 약 팔아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얄팍한 장사꾼 속셈으로 투약을 권하는 게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전제가 틀렸다는 얘기를 하는 거다. 발달에 장애가 있는 건 아니다. 아이마다 다르게 발달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전제를 가지고 임상의학은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진단한다. 잠깐만 생각해보면 된다. 사람은 모두 같은 방향, 같은 속도로 발달해야 한다? 얼마나 정치적인 언사인지 금방 깨달을 수 있다. 그렇다. 푸코까지 동원하지 않아도 장애에 대한 정의가 철저히 정치적인 것을 알 수 있다.

기실 사람의 발달 성장과 교육에 대한 모든 담론은 정치적이다. 정치가 사람을 다루는 철학과 기능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니 당연하다.

앙증맞은 다육식물을 집에 가져와서 매일 물을 주다가 어느 날 한쪽이 까맣게 죽어가는 다육이한테 “얘는 건강하지 않나 봐”라고 하지 않는다.

아주 간헐적으로 물을 주는 게 맞다. 그게 다다.

(2017.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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