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엿새째 경남 울주군 신불산자연휴양림
영남알프스의 7개 봉우리 중 하나인 신불산에 들어왔다. 신불산자연휴양림에서 3박을 한다. 유명한 신불산 억새평원에도 가볼 예정이다. 3대 억새군락지니 5대 억새군락지니 할 때 여기 억새평원이 거론된다. 이쪽에서 바람 불면 은빛이었다가 저쪽에서 바람 불면 갈색이었다가 반복하는 햇억새의 군무를 보고 싶다. 신불산은 산림청 지정 100대 명산에도 들어간다.
하지만 일본 목장에서부터 한 달 넘게 아이들과 24시간 생활하다 보니 체력이 고갈된 상태다. 억새군락지가 주는 경탄으로 피곤한 몸도 회복되길 바라고 있다. 그러자니 산길을 걷는 적지 않은 에너지 사용이 있어야 한다. 삶은 언제나 모순의 결합체로만 존재하나 보다. 죽을 둥 살 둥 살아보니 총합은 제로가 되는 게 순리인 듯.
울주군에 오기 전에 경주에서 출발했다. 불국사를 가려다가 먼저 석굴암을 봐야겠다 싶어 토함산에 올랐다. 어떤 초로의 부부는 스마트폰으로 송창식의 토함산을 크게 틀고 지나간다. 인생은 짧고 노래는 길구나!
석굴암 관람 후 불국사는 패싱~ 신불산으로 바로 왔다. 3년 전에 불국사 석가탑 해체 후 재조립한다고 관광객에게 노출하지 않았었다. 새로운 몸매의 석가탑을 보고 싶었지만 우리 아이들과 불국사를 견학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지나간 것이다. 아이들과 여러 날 다니다 보면 속상한 일들이 종종 있다. 아이들이 어른의 거울이라는 표현을 받아들인다면, 어른으로서 답답하고 아이들에게 미안한 일이 많다.
그러면 가끔 이런 생각도 한다. “내가 이 아이들에게 뭐지?”
선생 또는 교사라는 이름표를 달고 아이들을 인솔하고, 돌보고, 보호하고, 가르친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고 가공의 예이다. 그러나 비슷한 일은 무수히 많다)
“선생님, 너무 힘들어요. 얼마나 더 걸어야 하나요. 그만 돌아가요.”(말끝에 우는 시늉을 한다)
하이킹을 하다가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아이에게 교사로서 세 가지 대응이 있을 것이다.
하나, 달래는 것이다. “얼마나 힘드니. 선생님도 힘들어 죽겠네. 여기까지 걸어온 네가 자랑스럽구나. 지난번 백록담도 올라갔잖니. 그보다는 쉬운 길이니까 좀 더 힘을 내보자.”
둘, 반박하는 것이다. “야~ 이게 뭐가 힘들어. 네 꾀병은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엄살 좀 그만 부려. 얼마 걷지도 않았어. 이제 곧 음료수 사달라고 떼를 쓰겠네. 어휴, 네가 뭔 생각을 하는지 다 알거든!”
셋, 무시하는 것이다. “.................”
다른 대응이 있을까. 뭐 있다면 세 가지를 적절히 섞어서 조합한 것이다. 또는 세 가지 대응에서 수위를 조절하는 정도일 것이다. 내 경우 가끔 이런 방법도 쓴다. “뭐, 힘들다고? 좀 전만에도 펄펄 뛰어다니던 녀석이? 셋 세고 내가 잡으러 갈 테니 잡히면 각오해라. 잡히면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질 거야. 크크크... 자 하나~ 둘~ 셋!” 이러고 잡으러 달려가면 100% 아이는 쏜살 같이 달아난다. 두 번째 방법의 변형이라 하겠다.
셋 중에 뭐가 바람직한가. 바람직한 방법이 따로 있나.
나름 다채로운 실패 경험자로서 말할 수 있다. “바람직”이 없다. 셋 다 가능하며 유용한 방법이다. 각각 스타일의 선생님 세 사람이 있어도 좋고, 한 선생님이 서로 다른 세 방법으로 대응해도 된다. “콘텐츠는 전달되지 않는다”는 명제가 가리키는 방향이 셋 중 어떤 방법으로 아이에게 대응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다만 구조가 전달된다” 이 말은 동갑내기 과외하기에서 김하늘이 권상우에게 한 “넌 학생이구 난 선생이야” 대사와 같다. 선생과 학생으로 만나는 구조만 아이나 선생이 공유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를 어른이 만드는 것이고 아이는 일방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선생과 학생이 서로 합의하여 구조를 만들지 않는다.(지금은 그렇다. Education 3.0 이후 선생과 학생의 구분이 없어지면 구조도 합의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겠다. 그때는 지금의 공교육은 완전히 다른 모습일 것이다)
먼저 선생이 어른으로서 구조를 만든다. 그 구조를 어린 학생에게 전달하면 학생은 구조를 받아들인다. 학생은 구조 안에서 스스로 콘텐츠를 쌓아 올린다. 교사가 학생에게 콘텐츠를 줄 수도 없고 주어서도 안 된다.
선생이 어린 학생의 투정을 위로하고 받아들이든 윽박지르며 탄압하든 걍 무시하든 그에 대한 각각의 해석은 어린 학생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 가지 모두 성장을 위한 콘텐츠 원료가 된다. 모두 양호한 원료다.
중요한 것은 “나는 네게 언제나 교사로서 곁에 있을 것이다”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네게 폭력 가해자로 있을 게’ ‘네게 욕설 유발자로 있을 게’ ‘네게 열등감 공급자로 있을 게’는 있을 수 없다. 학생의 곁에 교사로 있겠다는 다짐은 교사로서 태도가 핵심이다. 어떤 태도를 견지하는가. 그 견지가 지속적일 것인가. 이게 다다.
누구나 훌륭한 선생님이다.
(2017.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