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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에서 B로 전환하는 세계

열 닷새째 경주 국립경주박물관

by 박달나무 Sep 2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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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마산을 떠나 경주로 왔다. 내일 신불산 자연휴양림에 들어가는데, 날짜 계산을 잘못해서 오늘 잠자리를 마련하지 못했다. 급할 땐 에어비앤비가 효과적이더라. 경주 중심지의 28평(형으로 보이는) 아파트 독채를 5만 원에 구했다. 들어와 보니 기대보다 좋다.
숙소 오기 전에 경주박물관에 갔다. 늘 그랬던 것처럼 성덕대왕신종을 보고 신라역사관(본관)에 들어가 황남대총 전시관을 중심으로 구경했다. 다 둘러보는 건 우리 아이들에게 아무런 정보를 줄 수 없기 때문에 "황남대총"만 기억하자는 취지~
우리 아이들의 배경지식을 거론하기엔 너무 어리다는 점이 분명하지만, 오랜 시간 함께 생활하다 보니 느껴지는 게 있다.
아이들에게 시간의 흐름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것과 다르다. 시간 자체가 휘발된 느낌이다. 예를 들면 '에밀레종이 1300년 전에 만들어졌다'라고 말하면 '먼 옛날에 만든 아주 오래된 종(鐘)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텐데 아이들 얼굴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천 년 전에 사라진 신라가 있고 현재 우리가 서있는 경주가 신라의 수도였다고 말하면 헷갈려한다. 신라가 있었는데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 어색한 거다. 신라는 지리적으로 다른 나라여야 한다. 신라가 한국은 아니니까.
위치(x축)와 시간 흐름(y축)이 인지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인데 y축이 사라진 느낌이다. 어제나 100년 전이나 1000년 전이나 차이가 없다. 다른 시간에 있다면 마치 다른 위치에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좌표평면이 아닌 수직선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엄청난 인지오 류가 생길 것이다.
10여 년 전에 많은 아이들이 발췌독(拔萃讀)을 한다는 걸 알았다. 우리 아이들은 만화도 발췌독을 한다. 학습만화에서 그림만 빠른 속도로 보고(1초에 두 페이지 정도 진도가 나간다) 흥미 있는 이미지가 나오면 그쪽만 말풍선도 같이 읽는다. 
시간의 휘발을 고민하다가 아이들이 왜 발췌독을 하는지 짐작이 간다. 스토리는 시간의 흐름과 밀접하다. 사건은 언제나 선후관계가 있다. 기승전결이 있고 원인-결과는 곧 시간의 흐름이다. 그러니 줄글이든 만화책이든 유투브든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야(봐야) 스토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경우다. 시간 축이 없는 아이들은 전체적인 스토리가 중요하지 않다.(다만 아직 추정 수준이다) 최근 유병재 블랙코미디 공연을 2분 이하로 끊어서 올리는 영상 클립이 선풍적 인기를 끄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생각을 더 깊이 해보면 이건 엄청난 싸움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안다는 것은 당연히 전체를 파악해야 하고 맥락이 중요하다는 측(A)과 맥락과 관계없이 얼마든지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측(B)의 싸움이다. 
내 경우는 물론 A 측이다. A가 유병재의 2분짜리 클립 하나를 보고 박장대소하는 것과 B가 깔깔거리는 메커니즘이 다르다. A는 온갖 배경지식이 동원되면서(자기의 경험치를 활용하면서) 뿌듯한 마음으로 코미디를 즐긴다. B가 웃는 건 다르다. 유병재의 표정 하나만으로도 웃는다. 개콘이 왜 저리 5살용으로 전락했나 생각해보니 시청자가 대부분 B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연 B가 A보다 열등한가에 대한 성찰에 있다. 즉자적인 나는 A가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B를 어떻게 A로 끌어낼 수 있을까 고민하며 살았다. 하지만 갈수록 과연 그런가 의문이 들고 급기야 A가 우월하다는 건 A만의 생각이지, B가 열등하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10년 안에 B 측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B방식이 창의적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문명을 주도하면서 교육제도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은 서로 싸우는 중이다. 
결국 B가 이길 것이라고 보지만 여전히 나는 A에 발 담그고 있다. 이게 괴로움의 근원이지 않은가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https://youtu.be/8cGIggo0ywY

(2017.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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