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나흘, 충남 태안군 소원면 천리포수목원
9월 5일 주유천하 프로젝트를 가동해서 24일째 날이다. 오늘로 프로젝트는 막을 내린다. 그러고 보니 2009년 7월 말부터 24일 동안 중고등학생들과 제주도에서 캠프를 진행했는데 8년 후에 다시 24일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2009년에는 제주의 폐교에서만 있었고 대안학교의 시작을 알리는 프로젝트였고 이번엔 전국을 돌았고 대안학교를 마무리하는 프로젝트가 됐다. 단기여행은 호남을 종종 방문했는데 이번엔 주유천하 프로젝트임에도 호남에서는 하루도 머물지 못했다. 고흥이나 장흥처럼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남녘의 아름다움도 아쉽고, 보길도에서 느꼈던 넘치는 인심도 그립다. 다음 기회로 돌리고 싶은데 과연 다음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이들과 함께 움직이는 다음을 말하는 거다.
올해로 학교 밖 어린이 청소년을 직접 만나는 일에서 은퇴하려고 한다. 지난 10년 동안 후회 없이 뛰었다. 후회 없다는 것이 만족했다는 건 아니다. 내 깜냥으로는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했다는 말이다. 더 이상 감당할 일이 아니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나는 작아졌다. 상흔이 적지 않다. 새로운 거인을 기대한다. 그를 위해 지난 10년을 포함 아이들을 만났던 30년을 잘 정리하는 게 내 몫으로 남아있다.
주유천하 프로젝트는 마쳤지만 10월부터 연말까지 스페셜 캠프는 계속된다. 주유천하와 달리 한 곳에 머물면서 진행하려고 한다. 노마드로 남아도 좋겠지만 인류가 멸족하지 않은 결정적
변화가 정주생활로 진행한 것이라 한다면 우리 아이들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석 달은 한 곳에서 살려고 한다. 수많은 장소와 조건을 고려했는데 결국 서울에서 너무 멀지 않은 곳을 선택하게 됐다. 추석 연휴 이후 공개할 테니 누구라도 방문해서 우리 아이들하고 놀 수 있다.(특히 질적 연구자에게 방문을 권한다)
오늘 식전부터 밀러가든을 시작으로 수목원 곳곳을 누볐다. 인류에게 나무만큼 고마운 놈이 있었을까. 풀만큼 결정적 공로자가 있었겠는가. 그저 천리포수목원을 뱅뱅 도는 것만으로도 우리 아이들은 도움을 받을 것이다.
지금 우체통에 넣은 엽서가 언제 배달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반드시 배달된다. 언젠가 배달될 엽서를 위해 열심히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린다. 주유천하 프로젝트는 마치 언제 배달될지는 모르나 배달될 약속은 분명한 엽서를 쓰는 일과 같다. 돌아다니면 수많은 명사(名詞)와 마주친다. 아이들은 낯선 명사를 자기 말 꾸러미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괜찮다. 천리포수목원에서는 참나무 종류가 여섯 가지가 있다든가, 멀구슬나무/꽝꽝나무/가시 호랑 나무/배롱나무/노각나무/딸기나무/생강나무/닛산/후박나무/편백/측백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나무 종류와 목련도 별목련/비온디 목련/제니 목련/황목련/백목련 등 100여 종의 이름을 만나게 된다. 당장의 성과는 서너 가지 나무 이름이라도 외우고 오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언젠가 배달될 엽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을 것이다.
"너는 여기를 왔고, 동무와 걸었고, 함께 웃고 떠들었다. 그래서 너는 그날로 기억될 오늘 성공했다"
주유천하 시리즈 글을 마치면서 며칠 전 말하다 말았던 '의도적인 불결'에 대해 덧붙이고자 한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아이들의 의도적인 불결한 행동에 골머리를 앓았다.
오줌똥을 싸는 건 감정이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음식을 손으로 집었다 놨다 하고 양념을 바지에다 쓱쓱 닦는 걸 비난과 꾸중과 온갖 잔소리를 뚫고 꿋꿋이 이어갈 때 울화가 치민다. 마찬가지로 골백번을 잔소리와 친절한 안내를 했는데도 모래를 옆 사람 머리에 집어던질 때, 맨발로 밖과 안 구분 없이 자유롭게 다닐 때, 가위로 주변에 잘라지는 모든 걸 아작을 내놓을 때, 코를 닦아서 손등과 옷 앞자락이 번들번들한 채로 30시간을 버틸 때, 마른땅과 고인 물을 가리지 않고 밟아서 운동화를 적신 채 돌아다녀서 양말과 발가락을 악취의 온상으로 만들 때, 양변기 주변에 오줌을 흩뿌려놨을 때, 식탁 밑을 음식물 쓰레기장으로 만들어 놓을 때 열이 벌컥 난다. 위험한 행동은 서술하지 않고 불결한 행동의 일부만 지적한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지적 장애가 아니다. 그 반대다. 눈치로 들어가는 대학이 있다면 단연 서울대 합격이다. 잔소리를 넘어 협박으로 갔다가 읍소도 동원했건만 어쩜 저리도 꿋꿋하단 말인가. 감탄이 절로~
그러다 가설을 세우고 검증을 했다. 세운 가설이 맞는지, 오류는 없는지를 따져본 것이다. 가설은 '의도적으로 불결하게 행동한다' 어쩌면 아이들의 의도적인 행동은 효율적이다. 효율이냐 아니냐 하는 판단은 절대적이지 않다. 매우 사회문화적인 개념이 효율이다. 나와 아이들의 사회문화적인 배경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아이들의 효율이 내게는 끔찍함일 수 있겠다.
변량(變量)이 클수록 선(善)이라고 전제할 때 아이들은 기준점(zero)에서 멀어질수록 변량이 크다고 생각하고 수직선상에서 오른쪽(+)으로 달리지 않고 왼쪽(-)으로 달린 것이다. 왼쪽으로 달리는 건 경쟁이 없고 에너지가 덜 들어서(마치 흐르는 물결 방향으로 노를 젓는 것처럼) 아주 쉽다. 어차피 엔트로피는 증가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자신이 애써서 혼란도를 높였다고 우기는 것이다. 극도의 혼란 상태를 '증진'의 결과로 말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숫자에 절댓값을 걸어서 +,- 부호를 삭제하고는 변량만 크다고 어필하는 것이다. +100과 -100이 같다고 주장한다. 인류의 문화는 에너지를 소비해서 엔트로피를 낮춘 결과물이다. 어차피 엔트로피가 높아질 텐데 그걸 자기 노력의 결과라고 강변하니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지금 한국사회가 절댓값을 씌워 부호를 삭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뿌리는 식민지에서 독립국가로 변신할 때 정의가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이다. 가지는 한국전쟁 10년(1945~55)이다. 그 끔찍한 터널에서 살아남는 것이 선(善)이라고 모두 동의하는 세월이었다.
목숨 걸고 독립을 위해 싸운 것이나 일제에 부역한 것이나 절댓값은 같은 양이라고 70년 이상 우겼다. 전쟁통에 죽인 놈이나 죽은 놈이나 극도의 스트레스는 마찬가지라고, 그래서 모두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퉁친다고 주장한 세월이 우리의 현대사다. 어이도 없고 어처구니도 없다. 혼도 없고 전통도 없고 정의도 없고 제정신 가진 이도 없다.
지난 시간의 중첩이 지금 아이들의 의도적인 불결을 낳았다. 보호자가 자신에게 집중하게 하고, 그런 결과로 관계의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자신과 주변을 더럽게 만드는 것은 에너지가 거의 들지 않는다. 그런데 보호자의 에너지는 급격하게 증가한다. 보호자의 에너지를 자신이 받아 안을 수 있으니 남아도 너무 남는 장사인 게다.
전에도 말했지만 평화로운 시절에만 가능한 시나리오다. 아이가 한껏 높인 엔트로피를 어른 보호자가 예외 없이 기를 쓰고 다시 낮추지 않는가. "네가 더럽힌 건 네가 책임져라" 이렇게 말하지 않는 거다. 아니 못하는 거다. 아이들에게는 꽃놀이패이며 알고 즐긴다.
그러나 이건 매우 한시적인 현상이다. 20대가 되어 어른 보호자가 사라졌을 때 진정한 소외에 직면할 테니 말이다.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고 아무도 함께 하려고 하지 않을 때 크게 상처받고 좌절할 게 분명하다. 그래서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인데, 쉽지 않더라. 꽃놀이패라며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배후에 부모가 아닌 한국사회가 있다. 참으로 대적하기 어려운 놈이다.
그렇지만 추석 연휴 때 잠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서 석 달 동안 적어도 어이도 없고 어처구니도 없는 어리석은 행동을 고쳐보려 한다. 그야말로 '존버'의 세월이다. (2017.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