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다양한 가면을 보유한 아이들

스무 사흘 충남 태안군 소원면 천리포수목원

by 박달나무

스무 사흘, 간밤에 비가 내렸지만 고맙게도 아침에 그쳤다. 아침 창을 여니 기분 좋은 차곰차곰한 느낌이 좋다. 물기 먹은 풀냄새가 확 들어온다. 여행을 마치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나.... 우선 내일이면 서울로 복귀한다는 생각이 먼저 찾아왔다. 아이들도 마찬가질 것이다. 집에 돌아가는 날을 카운트다운하더니 최근에는 아무도 남은 날짜를 세지 않았지만 어찌 집이 그립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루할 틈 없이 진행되는 여정 때문에 여행 프로젝트의 마지막이 성큼 다가온 느낌일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4주가 아닌 100일이나 일 년 프로젝트가 가능할까. 지금 상황으로 가능하다고 보인다. 하지만 인솔자는 불가능하다. 프랑스의 쇠이유 프로젝트는 청소년과 멘토가 1대 1로 석 달 정도 2000~2500km를 걷는데, 프로젝트를 마친 멘토는 5개월 유급휴가를 갖는다고 한다. 그마저도 다시 멘토로 신발 끈을 매는 사람은 드물다고. 이런 프로젝트는 체력의 문제가 아니다. 24시간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고통스럽다.

우리는 서로 의지하는 관계가 아니고 교사가 어린이를 일방적으로 돌봐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지난 4주 동안 육체적으로 힘든 건 없었지만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웠다. 통증은 신경의 문제이지만 고통은 대뇌의 문제다. 내가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 아이들의 미래 고통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내 욕망 때문이다. 도통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방치하면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돼서 망가질 것 같은데, 어떻게 이 아이들이 건실한 청년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줄 것인가. 과연 도와준다는 것이 가능은 한 건가. 혹시 내 정성이 아이들의 미래를 더 망치는 건 아닌가. 수많은 질문에 대답을 못하겠다.

대답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이 교사 정체성을 뒤흔든다. 대답을, 즉 처방을 내놓지 못하는 교사가 과연 교사라 할 수 있나. “처방은 없다, 다만 기술(記述)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믿으면서도 고통받는 환자에 대해 처방전을 쓰지 못하는 의사가 의사일 수 있겠는가 하는 근대적 고정관념이 자꾸 고개를 든다.

일본에서 운전할 때 상당히 긴장하게 된다. 우리와 운전대가 반대기 때문이다. 긴장을 풀면 자칫 한국에서 운전하던 버릇이 자연스럽게 살아나서 역주행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주행을 한 적도 있다. 그래서 내가 고안한 방법은 짧은 주기로 계속해서 현재 내가 달리는 차선이 일본 도로에 맞게 선택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콘텐츠를 전달할 수 없다는 걸 잊지 않았는지, 처방전이 있을 수 없다는 걸 여전히 인정하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하지만 그런 의식적인 행위가 역으로 여전히 교사로서 성과를 만들어내는 결과물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작용한다는 뜻이다.

자유로워지겠다는 의지는 제도와 인습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인데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제도를 벗어나서 뭐 하러 제도권을 기웃거리는가 말이다. 심지어는 제도권으로 돌아가려고도 한다. 심란한 세월이다.

우리가 머무는 천리포수목원은 천리포해수욕장과 맞붙어 있다. 천리포 옆에 만리포가 있고 다른 방향으로 백리포, 십리포, 일리포가 이어진다. 이름이 재밌다. 최근에 십리포, 일리포는 이름이 바뀌었다. 만, 천, 백에 비해 이름이 주는 왜소한 느낌이 싫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게 대표적인 인습이라 할 수 있는데 아이들도 여기에 묶여있다. 즉 큰 것은 좋은 것, 부러운 것이고 작은 것은 나쁜 것, 부끄러운 것에 대응하는 디자인된 이데올로기에 젖어있는 것이다.

재작년에 초등학교 입학일에 내게 와서 3년을 함께 지낸 아이(C)가 있다. C는 처음에 숫자 ‘1’만을 고집했다. 1등이어야 하고, 번호 배당도 반드시 1이어야 하고, 일부러 전철 1호선을 타러 간 적도 있다. 심지어 전철을 타도 1-1 출입구를 이용하려고 했다. 이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숫자는 인공물이고, 선호 순위를 정하는 것은 본능적인 반응이 아니라 추상적 정신활동의 결과다.

현재 C는 전혀 다른 아이가 됐다. 숫자 1에 집착한 적이 있었던가 싶은 아이다. 하지만 처음 C를 만났을 때 매우 당황했고 무섭다는 생각까지 했다. 어떻게 세상을 6년 반 산 아이가 세상의 주류 디자인을 자신의 패턴으로 채용하고 있단 말인가. 무엇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단 말인가.

초등학생을 만난 2013년 이전엔 중고등학생들을 만났다. 그때는 10대 아이들의 개인적 성향에 초점을 맞춰 고민했다. 5년째 초등학생을 만나고 있는데(과거에 초등교사로 20년 일한 경험은 거의 참고가 되지 못했다) 어린이들은 완벽히 거울이다. 자신의 이미지를 그리지 못한다. 다만 비출 뿐이다. 미러링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햇빛을 비추면 햇빛을 반사하고 달빛을 비추면 달빛을 반사한다.

이런 어린이의 특성은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 내 모습을 고스란히 반사할 것이기 때문에 나 자신이 매체 없이 곧바로 세상에 노출된 것보다 더 긴장된다.

적지 않은 세월을 아이들과 기숙하며 살아 본 결과 우리 아이들은 다양한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다. 멀티 캐릭터가 맞다. 천재부터 바보까지 다양한 ‘존재’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 다양성이 나이를 먹으면서 단일화된다.


바보를 버리고 천재로만 남기를 바라는 것이야 말로 가장 바보 같은 판단이다.

딱 이 한 줄을 깨닫기 위해 그동안 선생 노릇을 했다고 본다.

아이들은 자신의 다양성을 알고 있다. 가/나/다/라/마의 캐릭터 중에 그때그때 필요한 캐릭터를 꺼내서 보여준다. 천사부터 악동까지 여러 얼굴 중 어떤 얼굴을 장착할지는 자신의 생존에 무엇이 가장 유리할까를 생각한다. 그러니까 어른인 내 앞에서 보여주는 아이의 모습은 나름 자신에게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한 결과이다. 다만 내가 만나는 아이들은 이 판단에 심각한 오류가 있는 것. 자신은 생존에 가장 유리한 놈으로 장착했는데 실은 가장 불리한 놈을 꺼낸 것이다. 방점은 ‘가장 불리한 놈’에 있다. 차선이라든가 차차선이라면 큰 문제는 아니다. 하필 왜 최악을 최선이라고 판단했느냐 말이다.

일본 도로에서 운전할 때처럼 짧은 주기로 스스로에게 묻는 것은 “최선과 최악에 대한 내 판단은 무엇으로 정확하다고 증명할 수 있는가”이다. 과연 나는 어떤 제도와 인습에 묶여서 ‘이건 최선이야’ 또는 ‘이건 최악이야’라고 판단하느냐 말이다.

손으로 음식물을 집어서 먹으면서도 양념 국물을 가슴과 배에 흘리는 아이에 대한 판단이 30년 전(처음 교사가 됐던 그 시절)과 지금이 같다면 잘못된 것 아닌가 싶다. 쉽고 편리하게 씻을 수 있고, 기계에 넣기만 하면 옷은 청결 상태로 회복되고, 건조 또한 20분 만에 해결되어 꺼내기만 하면 되는 인공물이 발달한 세상에 아이의 밥 먹는 태도를 판단하는 내 캐릭터는 고정된 감성에 묶여있는 건 아닌가 말이다.

난 여전히 이문세 노래에 가슴 뭉클하지만 지드래곤 노래에 감흥이 없다. 굳이 지드래곤 노래에 반응하는 몸으로 리셋할 필요는 없지만 아이들이 지드래곤에 열광하는 현실을 고려해야 하지 않나. 과연 지드래곤을 책을 많이 읽어 이해할 수 있을까. 공연을 많이 보면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 아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스스로에게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나. 그보다 이해하는 것이 선한 일인가. 이해 없이 컨트롤만 하는 건 악인가.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 그래서 이 길을 걸었고 앞으로도 걸으려고 할 것이다. 세상의 재밌는 건 모두 어렵다.

(2017.9.27)

20170927_144048_Burst04.jpg


keyword
이전 22화<슬픈열대>가 아닌 <슬픈십(10)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