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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Jul 21. 2017

획득과 참여

ADHD와 대안교육에 대한 해명

  세월호 참사가 꼬박 한 달을 지나갑니다. 세월호 출항 하루 전에 인천에서 제주 가는 배를 지지학교 아이들과 함께 탔다는 특별한 경험에 더하여, 사고 이후 전개 상황이 가슴을 에고 살 떨리는 형편이라 마음의 상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세종대왕 생일을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스승의 날이 되어 현재 학부모, 과거 학부모, 옛 제자들이 인사를 전해오기에 제 자신의 위치를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저는 지지학교의 교사이자 운영자입니다. 지지학교는 세간에서 널리 쓰는 “대안학교” 명칭을 쓰면서 대안교육을 지향하는 정체성을 갖습니다. 한국에서 대안교육의 역사가 좁게 잡아도 15년이 흘렀지만 대안교육의 정체성을 여전히 유동적입니다.

  “대안교육이 뭐야? 대안학교가 뭐하는 곳이지?”

  지지학교는 소위 ADHD 멍에를 쓴 어린이를 행복하게 하겠다는 성격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지학교는 대안교육을 하면서 ADHD 어린이가 올곧게 자라게 하겠다는 학교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의 성찬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심하게 몰아붙이면 말장난과 같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야지?”하고 물으면 “잘~”이라고 말하는 장난처럼 말입니다. 대안교육이 무엇인지 명확한 개념을 공유하지도 못하면서, ADHD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도 정리되지 않고 있는데 ADHD를 극복하는 대안교육이 무엇일지 애매모호한 것이 현실입니다. 좀 더 선명하게 지지학교의 교육 방향성을 밝히는 것이 지지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부모님에게나 관심을 보이는 많은 분들, 그리고 제 자신에게도 도움을 주는 일이라 여깁니다. 


  # ADHD에 대하여

  제가 ADHD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01년입니다. 서울 중목초 2학년 담임을 할 때인데, 여학생 한 명(현주)이 ADHD 증상을 보였지만, ADHD 명칭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현주는 간경화 말기의 아빠와 둘이 살았지만 사실상 돌봄이 없는 고아와 같았습니다. 가정 형편이 병원에 갈 수 없는 사정이라 담임인 제가 국립 중곡동 정신병원 소아청소년 정신과 과장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ADHD란 진단을 받았습니다. 약을 받고 현주에게 시간 맞춰 약을 먹이면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ADHD는 미국에서 명명됐습니다. 약물 개발도 미국이 했습니다. 다만 ADHD 치료약물은 ADHD를 위해 개발된 것이 아니라 중추신경 자극제(각성제)를 과잉행동 환자에게 투여했더니 과잉행동이 개선됐다는 보고에 따라 수년 간 임상시험을 거쳐 미국 FDA가 승인한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들이 받아들이는 ADHD 정보는 주의력결핍형이든 과잉행동형이든 또는 혼합형 ADHD이든 뇌의 손상 및 불균형에 따른 Disorder(장애, 병, 증상)로 추정한다는 것이고, 치료제는 아니지만 각성제를 투여했을 때 행동 개선이 이루어지니까 계속 각성제 투약을 하면서 환경 및 주변 인물과 관계 개선을 통해 Disorder가 개선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미국 의학 국의 해석의 핵심은 ADHD를 뇌의 문제로 보는 것입니다.

  ADHD가 실제 하든 그렇지 않든 주의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거나 행동 컨트롤이 잘 되지 않는 것이 뇌의 작용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음식에 대한 취향이나 좋아하는 영화 장르가 사람마다 다른 것도 뇌의 작용입니다. 맵고 짠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액션 영화만 선호하는 사람을 정신과적 환자로 보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ADHD의 유력한 원인을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으로 보고 있지만, 한국에서 대부분 ADHD 환아들이 특정한 환경과 역할에 처했을 때만 ADHD 증상을 보인다는 것은 뇌손상이나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제가 만난 수백 명의 ADHD 어린이 및 청소년은 좋아하는 분야에서 높은 집중력과 인내심을 보였습니다. 대체로 부모님을 싫어하거나 증오하였고, 부모님을 좋아한다고 해도 조건부였습니다. 자기에게 친절할 때만 좋아하고 자기와 의견 대립이 있을 때는 분노하였습니다. 치밀한 거짓말을 하고, 자기가 불리할 때는 ADHD 치료 환자임을 내세웠습니다. 대부분 질서를 마음대로 깨는 행동을 하는데 이는 과잉행동과 구분돼야 합니다. 마치 도덕성 결핍증과 같은 태도가 ADHD라는 진단으로 오히려 정당화되는 경우도 보입니다. 설혹 ADHD라는 이름을 아이가 모른다고 해도 병원을 오가고, 검사를 받고, 약을 복용하는 상황을 자기를 보호하는데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린이가 부모 및 어른을 꼼짝 못 하게 하는 방법으로는 ①운다 ②토한다 ③열이 난다 ④멘붕에 빠진 상태를 보인다 등이 있는데 ADHD 환아들이 이런 방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ADHD 환아들과 부모들을 상담하면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미국에서 정의하는 ADHD가 한국 아이들에게 없는 것은 아닐까. ADHD처럼 보이는 한국의 아이들은 또 다른 원인과 증상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고 관찰했습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대부분 ADHD 환아들은 미국에서 말하는 ADHD가 없습니다. 이들은 자기에게 불리한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투쟁하는 상태입니다. 다만 투쟁의 전략전술에 오류가 있습니다. 경험의 축적 없이 전략전술을 무의식에서 풀어나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경우입니다.

  풀어 말하자면, 아이들은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했을 때, 누구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방법을 고민합니다. 전통적으로 약자인 어린이 청소년은 고통에 대해 피해자이며, 고통을 피하기 위해 가해자의 요구에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90년 대 이후 아이들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 상황을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갑니다. 판을 뒤엎는 겁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고통에 대하여 가해자 행세를 하려고 합니다. ‘내 아이 때문에 미칠 것 같은 엄마’가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미술시간에 칭찬받을 결과물을 만들기는커녕 비웃음을 살만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한다면 준비물을 아예 가져가지 않습니다. 스스로 주의력이 없어서 물건 간수를 잘 하지 못하는 아이가 됩니다. 주의력이 없어서 알림장을 챙기지 못하는 아이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미술 시간이라는 상황이 사라집니다. 시험 결과가 나쁠 것으로 예상된다면 철저하게 공부와 멀어지는 전략을 씁니다. 다시는 시험 결과에 대해 기대를 걸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매 시험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것이란 계산이 깔린 것입니다. 완전범죄가 되도록 자기 몸을 속입니다. 암기할 수 없는 상태, 읽을 수 없는 상태, 쓰기는 더욱더 불가능한 상태로 퇴행합니다. 실제로 퇴행합니다. 오줌똥을 싸기도 하고, 씻지 않아서 주변의 질책을 받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지시를 따르지 않도록 자기 몸을 세팅합니다. 고통을 피하고자 불안을 떠안는 전략을 사용하지만 결국 더 큰 불안한 상태에 빠지는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빠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느끼는, 그토록 피하고 싶은 고통은 무엇인가. 획득의 실패가 곧 고통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바로 학교 시스템과 직결됩니다. 학교 시스템은 유아 단계의 가정생활과 어린이집, 유치원을 포함합니다. 산업시대 공교육 시스템은 지식의 획득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가 대안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대안교육과 공교육의 차이점

  교육이란 모르는 상태에서 아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며, 이는 비어 있는 지식의 창고를 가능한 가득 채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공교육의 기반이며, 그런 기반 위에 디자인한 시스템이 학교입니다. 공교육 학교와 공교육 커리큘럼은 한 배에서 나온 쌍둥이입니다.

  ‘세 자릿수 나누기 두 자릿수’를 할 수 없었던 아이가 학교 수업(또는 학원)을 통해서 계산할 수 있었다면, 나눗셈에 대한 지식이나 기능을 획득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학교에 의해 키워진 우리들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학교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으로 이런 논리가 참인 경우는 수업이 이루어진 공간과 수업이 이루어지는 당시만입니다. 즉 지식이, 획득되거나 또는 획득에 실패하게 되는 것처럼 어떤 실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다만 수업이 이루어지는 교실에서만 지필평가나 인터뷰에 의해 지식이 실체로 보일 수 있습니다. 5살 아이가 길거리 간판을 최초로 읽었다면 이 아이는 한글 독해능력이라는 실체적 지식을 획득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10살 아이가 뛰어넘지 못한 뜀틀을 넘게 되었다면 뜀틀 넘기라는 실체적 신체능력을 획득한 것일까요. 뜀틀을 넘지 못한 옆 친구는 신체능력 획득에 실패한 것일까요.

  교육을 획득의 문제로 만든 것은 산업사회가 그 배경입니다. 가정과 교육기관에서 가르침을 수용해야 하는 아이가 계량화된 지식과 능력을 획득하지 못했을 때 겪는 고통은 어른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대두된 것이 참여입니다. 교육은 획득의 종용이 아니라 참여하도록 판을 벌려준다는 것입니다. 참여는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지며 획득에 대한 전제는 전혀 없습니다. 참여함으로써 교육목표를 달성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지식을 증진시켰는지 증진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순위 평가하는 일이 없습니다. 과거 운동회는 청군 백군의 최종 점수로 승패를 갈랐지만 최근 혁신학교를 중심으로 운동회 프로그램으로 민속놀이코너를 만들고, 아이들이 각 코너를 자유롭게 도는 것으로만 구성하는 것이, 전자는 획득의 의미로 후자는 참여의 의미로 교육을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안교육은 참여 입장의 교육과정 수립과 추진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육의 이름을 도용한 어린이 청소년 컨트롤 프로세싱은 매우 다양합니다. 스파르타식 시험공부를 시켜서 유명대학 입학에 성공하겠다는 대안학교도 있습니다. 건강식품 복용과 특별한 정신수련방법을 통하여 ADHD 치유가 가능하다는 학교도 있습니다. 영어 몰입교육으로 글로벌 인재를 키우겠다는 유명한 학교도 대안교육이라고 내세웁니다. 이들이 모두 지식의 획득을 대놓고 추구한다는 점에서 대안적인 교육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두려운 상태에 있는 어린이 청소년들은 올바로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정작 아이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모르거나 외면하는 것이라 봅니다. 획득하는 과정을 두려워하는 아이들을 더욱 강한 획득 과정에 집어넣는 것은 아이러니를 넘어 비극이 됩니다. 지식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및 집단의 행위에 대한 사후 설명의 성격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참여하는 행위만이 지식을 구성하며,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은 지식을 개인의 몸과 마음에 가두어 둘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타자 없이 오로지 개체만의 행위가 없는 것처럼 지식도 사람과 사람의 사이(관계)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지지학교의 방향

  키워드는 관계 맺기와 주체적 참여에 있습니다. 지지학교가 초등 단계의 학교이기에 이 두 가지 말고 고려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텍스트 위주의 전통적인 학습도 참여하는 장으로 재배치해야 합니다. 각 개인이 모듈화 된 지식을 기억하고 지필시험에 “정답”을 토해내고, 성적 서열을 매기는 것은 배제합니다. 관계 속에 존재하는(타자와 연동된 행위 안에) 지식을 개인의 능력으로 계량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개인의 능력으로 지식 획득 정도를 평가할 때 아이들은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관계 맺기와 참여는 동전의 양면처럼 학습의 안팎을 이루며 서열 경쟁에서 자유로울 때 ADHD의 멍에도 벗을 수 있습니다. 지지학교는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는 터전입니다. 참여의 장을 크게 나누면 운동, 여행, 놀이, 스토리텔링(독서 포함)입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의 래포 형성(가족 같은 친밀한 유대감)은 당연한 전제입니다.

  결국 지지학교는 ADHD를 Disorder로 규정하는 한 ADHD 판정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ADHD로 범주화된 아이들의 행동을 타고난 재능(Gifted Genius)으로 파악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지지(支持)해서 지지학교이고 타고난 재능을 가진 아이들로 보기 때문에 GG학교입니다. 

  이러한 정리들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 구체적인 실천을 전제합니다. 지지학교에서 지난 시간 교사와 아이들이 실천해 온 내용에 의해 위 정리가 가능했습니다. 정리된 내용은 당연히 수정됩니다. 어떤 내용으로 수정되고 치환될 것인지는 향후 지지학교의 실천 내용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201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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