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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Jul 20. 2017

100년 만의 쾌거, 중력파 실측이 나에게 던진 의미

원인과 결과는 태반이 거꾸로다

  이번 주부터 아이들과 기숙을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매일 등하교 대신 월~금까지 4박 5일을 학교에서 지내고, 금요일 저녁부터 3박을 가정에서 합니다. 기숙을 하게 된 동기는 함께 하는 시간을 늘리기 위함입니다. 학교라기보다는 생활공동체의 의미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3년 전, 단재 학교 학생들 6명과 여수 돌산에서 석 달 생활한 경험이 중요한 참고사항입니다. 당시 아이들을 멀리 데리고 간 것은 첫째, 선생으로서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그러한 정성을 아이들이 느끼고 받아들이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둘째, 아이들을 부모와 떨어뜨리기 위함입니다. 단재학교 학생들은 중고생이기에 부모와 단절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셋째, 형제가 드문 상황에서 또래나 선후배끼리 형제처럼 부대끼고 어울리라는 의도였습니다. 세 끼 밥을 해 먹이고, 빨래를 해서 각자 챙겨줬습니다. 등산을 하고 테니스와 배드민턴을 가르치고, 여행을 다니며, 책을 읽었습니다. 성과와 한계를 깨닫는 귀한 석 달 시간이었습니다. 서울에 돌아온 당시에는 다시는 이런 프로그램을 하지 않겠노라 주변에 얘기하곤 했는데, 다시 출항하며 닻을 올리는 기분입니다. "교육은 부모나 교사의 뒤에서 일어난다"는 말에 동의하면서 어린이 청소년 학습자와 교사가 생활을 공유하지 않는 것은 모순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기에 기숙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으로 스스로 정리합니다.

  기숙 세째날인 오늘은 수유리 화계사에 가까운 유현초등학교에 일일 체험하는 날입니다. 6시에 목욕탕을 다녀와서 아침을 먹고 화계사까지 가는 여정은 빡빡한 일정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다녀오는 과정을 힘들어했습니다. 러시아워의 2호선, 4호선 전철을 처음 경험하기 때문에 당황하는 눈치였습니다. 의미 있는 경험이었지요.

전철 안에서 무가지 신문을 읽는 이의 뒤에서 흘낏 신문 타이틀을 보니, 천체물리학 분야에서 대단한 발견을 한 모양이었습니다. 대략 우주 탄생의 비밀을 해명하는 중대한 발견이라는 정도만 읽어냈습니다. 나중에 검색을 통해 자세히 알아보니 하버드대를 중심으로 한 프로젝트 연구팀이 남극에 설치한 전파망원경을 통해 100년 전 아인슈타인이 예언한 중력파를 실제로 측정했다는 것입니다.


  중력파가 측정됐으니 빅뱅 후 급팽창했다는 우주 인플레이션 이론이 정당화된 것이라는 해설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점이 138억 년 전에 대폭발 하고, 폭발 후 10의 32 제곱분의 1초 후에 급속도로 팽창했다는 이론을 앨런 구스 교수가 30여 년 전에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번 중력파 발견으로 우주 인플레이션 이론이 증명됐다는 것이고, 아인슈타인이 처음으로 중력파를 얘기했으니 100년 만의 발견이라는 윤색된 언론식 호들갑입니다.

  이런 소식은 과학이 스토리텔링의 부분집합이라는 느낌을 가져다줍니다. 어려운 공부 많이 한 똑똑한 사람들이 풀어내는 동화 이야기로만 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학계의 떠들썩한 뉴스를 접할 때마다 "그래서 어쩌라고?(So what?)" 되묻게 됩니다. 

  하지만 이번 뉴스만큼은 뭔가 영감을 주는 느낌이었습니다. 바로 알 수 없었지만 새로운 경지로 나가는 입구에 선 느낌이었지요. 알 수 없고 희미한 그 느낌을 분명한 그림으로 만들고 싶어서 하루 종일 생각의 끈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희미한 느낌이 선명해지는데 하이델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안긴 '불확정성의 원리' 내용이 아니라 '불확정성의 원리'를 받아들이는(이해하는 것이 아닌) 자세에 대한 설명이 참고가 됐습니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존재하기는 하지만 "확률로서" 존재한다는 표현을 씁니다. 

  '만약 50% 확률로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과연 존재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지 어느 쪽이란 말인가. 50%가 주는 일상의 개념이라면 반만 존재한다는 것인데, 반만 존재한다는 것은 온전한 것의 반쪽이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는 것인지...' 

  저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해 짜증내면서 보이지 않는 구석에 처박아 놓은 개념인데, 우연히 EBS 지식 프라임을 통해 확률로 존재한다는 것이 동시에 다른 위치에 존재한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나 자신이 동시에 서울에도 있고 부산에도 있다는 말인데, 가히 머털도사의 털로 만들어낸 분신술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양자론의 주창자 보어와 하이델베르크가 충돌하면서 하이델베르크가 했다는 말이 충격을 주면서 제 희미한 영감이 조금은 선명해졌습니다.

  두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인데 동시간에 서로 다른 장소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기존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과학이 마술로 둔갑한 듯한 일이니까요. 자신의 원자 모델로 노벨상을 수상한 닐스 보어 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해 하이델베르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새로운 생각만이 세상을 열 수 있습니다."


  90년 대 중반 이후의 아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개념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성장한 7~80년 대 모델로는 요즘 아이들을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개념은 세상에 없던 개념을 창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존재하였지만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생각을 말합니다. 새로운 개념이 요즘 아이들만 설명하고 부모 세대에 대해서는 들어맞지 않아서도 안됩니다. 모든 세대, 모든 나라에 대해 설명 가능해야 할 것입니다. 

  중력파가 우주 인플레이션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겠지만 여전히 빅뱅이 왜 일어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빅뱅의 원인을 모릅니다. 태초에 시공간을 토해낸 빅뱅의 전(前) 단계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인 없이 결과가 만들어진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원인-결과 프레임 밖에 있습니다. 

  우리가 '안다'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이미 일어난 사태에 대한 해명의 형식을 갖출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태'의 원인을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사태는 맥락 없이(정확하게 말하자면 맥락을 알 수 없이) 발생하고 우리는 일어난 사태를 해석합니다. 그런데 사후 해석을 사태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착각에 빠집니다. 원인을 제거하면 사태를 전환하거나 진정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류의 반복만을 낳습니다. 

원인이라 서술했던 모든 것이 해석의 문제라면, 그리고 해석을 절대불변의 진리를 찾아 나서는 탐구여행으로 생각하는 한 우리는 문제 해결에 접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해석은 이미 역사적이며 사회적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뇌에서 해석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아이의 상태를 해석하는 것은 매우 트렌디한 문제입니다. 서양의 19세기에는 핑크가 남자아이의 상징이었고 파랑이 여아의 상징이었습니다. 유럽의 18세기에 어린이용 장난감이 상품으로 등장합니다. 그전에는 장난감을 돈 주고 산다는 개념이 전혀 없었습니다. 현재 술주정뱅이는 환자이지만 18세기에는 범죄자였습니다. 주체는 그 사람의 환경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푸코, 광기의 역사) 지금 한국사회에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 어린이 청소년들이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 세밀하게 파고들어 미시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상이 떠들어대는 확성기 소리에 적응이 돼서 멀리서 아이를 바라보는 것과 세밀하게 아이를 살피는 것은 너무나 다른 결과를 만듭니다.

  욕을 한다거나 급우를 때리거나 지각과 결석을 자주 하거나 수업태도가 제멋대로이거나 성적이 바닥이거나 우울하거나 소리 지르고 돌아다니는 행동을 다시 봐야 하고 재해석해야 합니다. 이미 해석한 내용이 어떤 트렌드를 반영한 것인지, 누구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인지, 어떤 사회체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 스스로 해명해야 합니다. 그런 소명 없이 ADHD나 소아 우울증, 강박장애, 자폐, 아스퍼거, 도덕성 결핍증 등을 정의(definition)하는 것은 권력에 순응하는 정의롭지 못한(injustice) 해석입니다.


  결국 해석은 언어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보고 느낀 점이 있는데 표현할 적절한 말 꾸러미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라면 해석할 수 없습니다. 해석 이전에 진술도 불가능합니다. 아이들이 그렇습니다. 아이들의 모든 행동은 사인(sign)입니다. 어른이 되면서 행동은 줄고 자기 사인(sign)을 적절한 말 꾸러미로 대체합니다. 아직 어리고 훈련받지 못해서 자신을 표현할 말 꾸러미를 충분히 갖지 못한 주체들이 행동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비정상'으로 정의(定義)되는 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단지 아이들은 적절한 말 꾸러미를 갖지 못했을 뿐입니다."


  아이들에게 적절한 말 꾸러미를 갖추도록 하는 것, 그것이 어린이 청소년 교육의 알파이자 오메가이지 않겠습니까.


추신) 아이들의 정체성(identity)도 확률로 존재합니다. 복수의 정체성이 같은 시간에 동시에 존재합니다. 하이델베르크 모델처럼 아이들의 정체성도 어른이 들여다보는 동시에 확률분포 곡선이 압축됩니다. 즉 아이의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들면 마치 한 가지 정체성만 있었던 것처럼 확률성은 사라집니다. 아이는 다중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지만, 그런 다중성을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왜 그런지 모릅니다. 하이델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과학계에서는 받아들이지만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단지 말 좀 깨나 한다는 사람, 공부 좀 깨나 했다는 사람들의 입방아(해석)만 있을 뿐입니다. 재능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은 수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 가르칠수록 대부분 재능을 잃어가고 운이 좋아야 한 가지 재능이 살아남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합니다. 그렇다면 가능한 가르치지 말아야 하겠지요. "오늘 아침 우리 할머니가 태어나셨다(할머니 생신이라는 것이 아니라 아기 탄생을 말함)"와 같이 받아들일 수 없는 상상이지만, 가르치지 않기 위해 땀 흘려 노력하는 교육과정이 있을까 하는 상상을 좀 더 이어가려고 합니다. (201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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