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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Jul 20. 2017

버트란트 러셀과 우치다 타츠루의 메시지

무한 루틴의 감옥에서 탈출할 지혜

  버트란트 러셀의 이름은 누구나 들어봤을 터, 하지만 엷고 밥 많이 먹는 박학다식(薄學多食)의 저는 그의 저서를 온전히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 유명한 <서양철학사>를 학생 때 러셀 것과 더불어 렘프레히트 것도 구입해서 둘 다 먼지 옷을 입혔습니다. 책 읽는 것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던 생활습관 덕이었습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철학뿐 아니라 수학, 천문, 과학 전 분야에 천재적 능력을 가진 학자이며, 비트겐슈타인과 특별한 인연에 대해 풍문으로만 알 뿐입니다. 그는 1872년에 태어나 1970년에 세상을 떠나 한 세기를 산 시대의 정신이자 증인이었습니다. 그가 사망하고 40여 년이 지났지만, 비트겐슈타인에게 끝까지 각을 세웠던 고집쟁이의 이미지로 남았던 러셀이 오늘 읽은 책 하나로 왜 러셀을 500년에 한 명 나올만한 사람이라고 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바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Why I am not a Chris-tian>입니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1957년에 출간된 책이고 한국에서는 범우문고에서 문고판으로 일부를 편집해서 90년 대 말에 출판했습니다. 얼마 전에 완역본이 나왔었는데, 저는 얇은 범우문고를 읽었습니다. 아르바이트로 주말마다 중3 학생과 합숙을 하는데, 속을 뒤집어놓는 이 녀석들이 마음을 잡고 책상에 오래 앉아 있어줘서 저도 책장에 오래도록 저를 기다려준 러셀 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120쪽 정도라서 금방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전문번역가의 번역이 아니라 문장이 많이 어색했지만 읽는데 무리가 없었습니다. 아래 글은 놀랍게도 1930년에 쓴 것입니다. 무려 87년 전 글입니다. 지난달에 신문에 기고했다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소재와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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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문고 153  pp70-72)                                          

누구나 다 성격이라는 것은 습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늘 믿어 왔다. 알코올이나 아편이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건 누구나 확신했고, 이 중 자유의지를 믿는 사람은 의지의 힘으로 술에 취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취했을 때 '영국 헌법'이란 말을 맑은 정신일 때와 같이 또렷이 발음할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한 번이라도 아이들을 다루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아이를 착하게 하는 데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웅변보다도 적당한 음식이 더 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유의지 이론이 정작 효과를 얻는 일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상식적 지식으로써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론적인 결론에까지 파고들지 못하게 하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괴롭히는 행동을 하면, 우리는 그를 나쁘다고 생각하려고 하면서 그 괴롭히는 행동의 원인을 깊이 파고드는 일은 외면하고 있다. 곧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그 원인이 그가 태어나기 이전까지 올라가게 되며, 따라서 아무리 상상을 해보아도 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일에까지 도달하게 된다는 사실에는 외면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자동차 다루기를 사람 다루듯 마구 다루지는 않는다. 그리고 자동차가 가지 않으면 이 괘씸한 자동차의 행동을 죄악으로 돌리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이 나쁜 놈의 자동차야! 네가 움직일 때까지 휘발유를 주지 않겠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는 어디에 고장이 났나 알아보려고 하며, 나아가 고쳐보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인간을 다루려는 것은 우리의 신성한 종교의 진리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어린아이를 다루는 데에까지 미치고 있다. 많은 아이들은 벌을 받음으로써 갑자기 더 나쁜 버릇들을 갖는다. 그러나 모르는 체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아마 이러한 버릇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벌을 주면 오히려 정신이상을 일으킬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벌을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정신이상이 되면 법정에서는 이를 버릇이 나쁜 탓으로는 삼되 벌이 나쁜 탓으로 생각지 않는다.
교육개혁이 정신 이상아와 정신박약아에 대한 연구에서 이루어진 면이 큰 것은, 이러한 아이들은 자기의 과오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책임이 없으며, 따라서 정상아보다도 더 과학적으로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최근까지는 아이가 공부를 잘하지 못할 경우 그 적절한 치료법은 매질이었다. 이제 이러한 생각은 아이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거의 사라졌으나 형법에 있어서는 그대로 남아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범죄 근성이 있는 자는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또한 광견병에 걸려서 사람들을 물려는 자도, 비록 자신이 도덕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지 모르나 없어져야 한다. 전염병을 가진 자는 비록 자신이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치료될 때까지 격리되어야 하며, 위조범 근성이 있는 자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전자는 후자처럼 죄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은 상식에 지나지 않는 일이다. 이것이 비록 기독교 윤리나 형이상학이 반대하는 형식의 상식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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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제목이 직접적으로 테마를 말해주고 있듯이 종교(기독교)의 존립기반이 '공포'에 있음을 강조하며 나온 얘기 중에 어린이 청소년 교육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직업병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하고 타이핑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배움의 과정에서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 놓여도 어른들은 개인적 처벌을 가하고, 아이 입장에서는 공포를 주입당하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나아가 사회를 지탱하는 동력도 공포를 연료로 한다는 지적입니다. 전반적인 글의 기조를 살피면 분리할 수 없는 몸을 육체와 영혼으로 강제로 나누고 세뇌한 기독교의 폐해를 신랄히 지적하면서 교육과 사회 전반에 공포를 행위의 원동력으로 삼으려는 이데올로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강력하게 동의하는 바입니다.

  서양의 과학자이자 철학자 러셀이 90여 년 전에 이렇게 말했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이 문제가 20년 전에 태동하기 시작(대안교육에 대한 움직임)해서 현재 진행형이며 이명박근혜 정부에서는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퇴행을 걷고 있습니다.

  이런 한탄은 충분히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뭐 한탄만 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도대체 문제 인식과 공유, 개인적 한탄에서 집단적 걱정 소통으로 반복되는 무한 루틴에 빠져 반복될 뿐 현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이유가 뭘까 늘 고민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이 있습니다.

  일본의 문화평론가이자 왕성한 저술가입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꾸준히 일 년에 다섯 권 이상을 출판하고 계십니다. 작가계의 차력사라 불릴만한 우치다 선생님은 우리의 무릎을 고장 나게 하는데(깨달음에 감탄하며 무릎을 연타連打하게 만들기 때문에) 저 자신 우치다 선생님의 팬이라 하겠습니다. 5년 전에 고베에 있는 우치다 선생님 집을 방문한 것은 제겐 매우 파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관련 http://cafe.daum.net/ggeschool/MAfo/150)

  <하류지향> <스승은 있다>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사가판 유대문화론> <일본변경론> <14세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교사를 춤추게 하라>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어른없는 사회> <곤란한 성숙> <곤란한 결혼> 등 우치다 저서 대략 120권 중 십 여권이 국내에 번역 출간됐는데, 이 중 3편을 신라대 박동섭 교수가 번역했습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우치다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도, 고베 우치다 집에 방문할 수 있었던 것도 박동섭 교수의 덕입니다. 아래 글은 박동섭 교수가 제공한 우치다의 에세이입니다. 여기서 무한 루틴의 감옥에서 탈출할 지혜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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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힘에 관하여(우치다 타츠루)  박동섭 번역

트위터에서 ‘말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원고를 썼다고 중얼거리니까 ‘읽고 싶다’는 요청이 많이(3통) 있었다.
전문적인 매체에 썼기 때문에 이웃들의 눈에 띌 기회는 적을 테니까 여기에 그 일부를 옮기기로 하겠다.
‘힘’이라는 것은 외형적․수치적으로 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내재적․잠재적인 자질이라고 하는 이야기 뒤에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예를 들면 ‘담력’이라는 것은 강한 스트레스에 조우했을 때 그 위험한 곳을 살아남는데 사활적으로 중요한 자질인데, 그것은 위기적인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보통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느긋하고 서두르지 않는 자세”를 취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발현된다.

즉 외형적으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아무 징후도 없는 것이 담력의 공덕이다. 그래서 ‘힘’을 오로지 외형적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 성과와 달성에 의해 계측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의 눈에 ‘담력’은 아마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들은 ‘담력을 단련하기 위한 교육 프로세스’와 같은 것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러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조차도 생각하지 않는다.

‘생명력’도 똑같다. ‘사는 힘’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자면 ‘무엇이든 먹고,’ ‘어디에서든 잘 수 있고’,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것과 같은 기본적인 3종의 능력이 그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컨대 주어진 장(場에) 적응하고, 갖고 있는 유한(有限)의 리소스를 최대한 활용하는 능력이다.
무인도에 표류한다든지 최전선에 가게 된다든지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명력은 필수적인 것인데 현대의 학교교육에서는 그러한 능력을 키우기 위한 체계적인 프로그램은 존재하지 않는다.

‘학력’도 똑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성적’과 동의어로 점수화해서 우열을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학력’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배우는 힘’을 가리킨다.
그것은 수량화를 강조하고 효율화를 강조하는 시대정신 덕분에 외형적으로 성적과 평가로서 표시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본래는 형태를 갖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배우는 힘’이라는 것은 ‘자신의 무지(無知)와 비력(非力)을 자각할 수 있는 것’, ‘자신이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선구적으로 아는 것’, ‘자신을 이끌어 주고 가르쳐 줄 사람(멘토)을 찾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일련의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힘은 성과와 달성으로는 표시할 수 없다.

배우는 힘은 ‘결성태(欠性態)’로서만 존재한다.
뭔가 부족하다는 자각의 강도를 가리켜 ‘배우는 힘’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미숙함의 자각’, ‘모종의 지식과 기능에 관한 결여감’, ‘스승에게 승인받고 싶은 욕망’과 같은 것은 우리의 삶의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배우는 힘’은 결성적(欠性的)으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격려하고 지원하고 개발하기 위한 실천적 프로그램은 물론 존재한다.
경험을 쌓은 교사는 그것을 알고 있다.

예를 들면 ‘성적이 나쁘면 사회의 하층으로 고정되어 거기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와 같은 공포심은 학습의 동기로서는 틀림없이 유용하다.
이 ‘공포심’은 실제로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점에서 자신이 잃을지도 모르는 것에 관한 결여감의 선취(先取)’라는 복잡한 심리 조작을 아이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경험이 가르쳐주는 것은 공포심이 강한 아이일수록 높은 확률로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하게 된다.
이 아이의 ‘배우는 힘’의 중핵에 있는 것은 ‘공포심’이다.

‘선취(先取)한 상실감’도 또한 일종의 ‘결성태(欠性態)’임에 틀림없다. 단 그것은 동학년 집단내의 경쟁에서 상대적 우위를 바라는 이상의 목표를 갖지 않는다.
하여 ‘공포심이 강한 아이’는 자신의 성적을 향상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똑같은 노력을(경우에 따라서는 그것 이상의 노력을) 경쟁상대의 성적을 내리기 위해서도 아끼지 않게 된다.
나는 그러한 노력을 ‘배우는 힘’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말의 힘’이라는 본 주제로 돌아가기로 하자.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대략 아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적인 의미에서의 ‘힘’은 무엇을 달성했는지 어떠한 성과를 올렸는지 어떠한 이익을 가져왔는지와 같은 실증적인 기준에 의해서 측정해서는 안 된다.

‘말의 힘’도 똑같다.
‘말의 힘’은 그것이 달성된 성과와 그것이 발화자에게 가져온 이익에 의해서 계측되는 것이 아니라 ‘말의 힘’이라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사용해서 자신의 사고와 감정을 진술할 때의 말의 부정확함, 부적절함을 슬퍼해야 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말의 힘’이라는 것은 말이 늘 과잉이든지 아니면 부족하든지 해서 아무리 해도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에 닿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는 능력을 말한다. (우치다 타츠루 저 "저잣거리의 문체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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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히 학력/결성태/공포/말의 힘이 키워드입니다. 이 중 저는 "결성태"가 우뚝 솟아 보입니다. 결(欠)은 결(缺)의 간자로서 '부족함'을 말합니다. 결성태는 "부족한 성질의 상태"로 직역할 수 있고 "부족함을 본질로 하는 성질"이라고 이해합니다. 부족하지 않다는 것은 본질을 벗어난 것입니다. 본질이 부족한 것이고, 부족 자체로 충족이라는 개념을 금방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만족의 반대말로만 부족을 사용해왔으니까요. 부족이 곧 충족이 되려면 "안다(인지)"가 다리를 놓아줘야 할 겁니다. 우치다 선생님이 "뭔가 부족하다는 자각의 강도"가 학력(배우는 힘)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상기해보면 말입니다.

  "넌 부족해!" 이 말은 공포를 심어주지만 "네가 부족한 것을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해!"라고 말할 때 배우는 과정의 아이는 비로소 성장을 위한 첫걸음을 뗄 것입니다.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에 닿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는 능력"이란 표현, 참으로 탁월하고도 탁월하지 않습니까.

(2013.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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