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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Jul 19. 2017

공부하기 싫도록 만드는 사회

왜 아이들은 공부하기 싫어할까

우리 아이는 하고 싶은 게 없다고 합니다. 평소에 아무 것도 안 해요.

   상담을 진행하면서 자주 듣는 말입니다. 아이와 동행한 부모가 하시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위 말이 사실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안 하는 아이는 식물인간일 수밖에 없을 테지요.

    이런 지적을 받는 아이들은 실제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다만 부모가 지적하는 것은 (학교)공부를 하지 않아서 성적이 저조하다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결국 노는 것은 열심인데 학교공부는 등한시하기 때문에 걱정이라는 것이 부모의 입장이고, 학교공부에 관심이 없으니까 노는 것에 더욱 열중하게 된다는 것이 아이 입장입니다.

    왜 아이는 학교공부에 관심이 없을까? 아주 오래된 교육자의 고민이며, 원인 분석과 처방에 대한 책이나 강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해결될 기미가 없습니다.

    학교공부에 관심이 없고 성적이 저조한 학생의 관심을 제고하고 성적도 오르게 할 수 없을까. 소위 부지런하고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교사들은 위 고민에 대한 해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교사 자신과 관계맺고 있는 학생들은 자신의 성실성의 결과로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성적도 상대적으로 오를 것이란 기대를 갖는다는 말입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이들은 여전히 공부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교사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거의 변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학생들은 학교공부에 관심이 없습니다. 상위 10%에 들지 않으면 심리적으로 공부 못 하는 학생으로 분류됩니다. 상위 10%만 서울권 대학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누군가는 상위 10%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하위 90%가 됩니다. 학교는 그나마 10%가 상위 소리를 듣고, 10년 전 쯤이라면 20:80 사회를 개탄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한국의 자산지니계수는 1:99 사회를 가리키고 있고, 0.1:99.9로 이행하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낍니다.

   개인적 집단적 노력을 아끼지 않는 일부 교사들의 동력은 학교에서, 교실에서 일어나는 교육격차를 해소하겠다는 의지에 있습니다. 핀란드를 예로 들며 뒤쳐지는 학생이 없게 하겠다든가, 아이 개개인 기질을 파악해서 알맞은 교육치유가 이루어지도록 하겠다는 소망으로 발도르프 연수를 받습니다. 다인수 학급에 적합한 방법으로 프레네 교육을 연구하기도 합니다. 유치원에서는 몬테소리에 이어 레지오 에밀리아 접근법이 유행합니다. 최근 초중학교 혁신학교에 도쿄대 사또 마나부 교수의 협동학습개념과 비고츠키 철학이 열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존 듀이, 야누슈 코르착, 자크 랑시에르, 노암 촘스키, 연암 박지원에게 이르기까지 교육자와 철학자들이 뒤엉키면서 열정적인 교사를 매개로 교실현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 열정적이고 실천적인 교사들에게 찬물이 될지 모르겠으나, 교사들의 노력은 대세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

   학교가 사회적 발명품이기 때문입니다. 발명품이라는 얘기는 필요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고, 만든 주체의 목적과 의도가 반영됐다는 것입니다. 사실 너무도 당연한 말임에도 불구하고(모두가 아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집단적 합의에 의한 간과(看過) 현상이 생깁니다. 사용자(학생과 학부모)의 욕망이 본질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사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카지노 이용자의 심리와 같은 것입니다. 누구나 카지노 기계의 확률은 이용자가 아닌 사업자에게 유리하게 설계됐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용자는 그런 구조를 환영합니다. 이용자에게 불리할수록 행운이 찾아왔을 때 더욱 큰 배당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계속해서 돈을 잃는 것은 '언젠가' 터질 잭팟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는 어이 없는 오해를 만들고 자신에게 최면을 겁니다. 그런 심리를 이용한 극단적 장치가 800만분의 1이라는 로또복권이지 않겠습니까.

   교사는 카지노의 딜러가 되었습니다. 카지노의 구조와 룰을 모두에게 공개하고 있고, 이용자의 출입은 자유의지에 달린 것이기에 테이블을 운영하는 딜러로서 학교의 교사는 공정한 게임을 진행하고 있다고 착각하거나 최면 상태에 있습니다. 모든 갬블링은 반교육적입니다. 베팅을 교육과정이라고 우기는 것은 어이없음을 넘어 부도덕의 극치입니다. '어이없음'은 바보에 대한 조롱이지만 '부도덕'하다는 지적은 의도적인 교육망가뜨리기에 대한 저항을 말한 것입니다.

   사실 학교의 발명은 애초에 시기마다 나라마다 좀 더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의 현재를 기준으로 얘기하자면 기업의 이익에 봉사하는 역할만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외적으로 인재양성의 역할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이마저도 한국의 공교육이 아닌 다른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공교육학교에서 공부하고 훈련하여 의미 있는 예술가로 성장한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기업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은 저임금 노동자를 배출하면서도 불만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데 학교의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못한다는 굴레는 저임금 노동을 받아들이는 깔대기가 됩니다. 경쟁에 뒤쳐졌으니 재화의 분배에서 뒤쳐짐을 당연하게 생각하라는, 그래서 생활의 불편함과 사람들의 멸시에 대해 자업자득으로 생각하라는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원천으로 학교가 기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능력주의 사회(메리토크라시)를 계속 지속시키려는 기업과 권력의 의도일 뿐 하늘이 내려준 사상도 아니요, 모두가 합의한 적도 없는 강요된 이념이지요. 

   메리토크라시를 정의롭게 해석하고 민주주의와 동일시하는 사회에서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배려라는 것이 동정과 시혜로만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면, 자산 격차에 비해 소득 격차가 비교적 적은 한국 사회에서 향후 소득지니계수가 커지면서 극단적 소득 양극화로 진행되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학교는 월 소득 200만원 미만의 근로자를 (2012년 한국 평균 직장인 소득은 월 240만원이지만 표준편차가 크기 때문에 200만원 이하 월 소득은 상당한 저임금으로 봐야 한다. 대안학교 교사 평균 급여는 160만원 정도) 저항 없이 손쉽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장치로 전락됐다는 것이 냉정한 진단입니다.

   2009 개정교육과정에 의해 올해 개편된 초등 1,2학년 교과서를 조금만 살펴봐도 내용이 만6~7세 어린이가 학습하기에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학의 경우 아예 대놓고 낙오자를 만들겠다는 심산입니다. 학교 수업은 40분으로 잘라 놓고 주 3~4차시를 진행하면서 현재 2학년 수학 교과서를 소화해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서울의 경우 강남북 격차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고 도시와 농어촌 지역의 학습격차는 그보다 더 합니다. 이것을 당연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세뇌일 뿐입니다. 좋은 인재를 양성한다는 단순한 논리로 보더라도 교육과정을 이렇게 어렵게 만드는 것은 황당한 일입니다. "누가 누가 잘 하나"가 아니라 "누구 누구를 낙오시킬 것인가"를 위해 만들어진 내용일 뿐입니다. 중학교 교과서 개편도 마찬가지고, 집중이수제도 통합교과 운영도 결국은 낙오자의 양산만 남습니다.


<아래 두 사진은 초등2학년 1학기(4월 진도) 과정>




학원 조차 0.1% 인재를 구호로 내건 버스를 운행합니다. 99.9% 사람들은 자신의 무능과 게으름을 탓하면서 우울한 삶을 영위할 것이며 의료보험혜택에 따라 값싸진 정신과약물을 박카스처럼 먹게 될 것입니다. 그럴리가 없지만 대중의 압력에 의해 박근혜 대통령 공약대로 선행학습금지법을 만든다면 교육과정 개정을 통해 교과내용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 분명합니다. 선행학습이 아닌 현행학습을 심화시켜 낙오자를 만들어내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선의의 교사가 학습격차를 줄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성실함을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아무 의미도 없으며, 미시적으로 들여다봐도 교수방법론과 공학적 수업설계는 헛발질에 불과합니다. 카지노에서 돈 따는 법이 따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카지노는 출입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답입니다.


길지 않은 위 칼럼을 쓰는데 2주일 정도 걸렸습니다. 쓰다가 중단하고 다시 쓰다가 지우고 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예민한 문제에 천착한 시간이었습니다. 글에 주장을 담기에 조심스러웠습니다. 읽는 이의 입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고 찬반이 생길 수 있겠습니다만 원칙적으로 제 이야기가 틀리지 않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학습력 저하 현상은 저임금을 유지하려는 기업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란 주장을 우치다 선생님 강연에서 들었습니다.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은 일본의 저명한 문화평론가이자 저술가입니다. 우치다 선생님 말씀에 무릎을 쳤지만 깨달음에 대한 리액션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저 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이 살면서 몸으로 느끼는 메카니즘입니다. 40년 전 제가 초등 2학년 때 재래식 화장실 오물을 지게로 퍼나르던 분뇨수거원 아저씨가 술 냄새 풍기면서 "공부 못하면 아저씨처럼 살게 된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라" 하던 목소리가 지금도 또렷합니다. 이 목소리 누구나 듣고 살아왔을 테니까 우치다 선생님 주장이 새삼스러운 것입니다.
다만,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단순한 논리를 잊고 있었다는 각성이 올라와서 무릎을 치게 된 것입니다. 기업이 근로자의 저임금으로 초과이득을 늘려나가는 한 학습의 지역 격차와 교실 격차, 개인 격차를 교사가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부모에게도 답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치권력도 불가능합니다.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 하지 않습니까.제가 말하는 것은 일부 경쟁에서 살아 남은 아이가 있겠지만 크게 보면 그 아이는 경쟁에서 엎어진 대다수 아이들의 덕이라는 것이지 경쟁우월성을 노력의 결과로 치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최면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 할 것입니다.


"서술이 처방이다(Description is Prescription)"는 유명한 문구가 있습니다. 오늘의 서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상상을 펼치는 편지를 이어가겠습니다. (201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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