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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Oct 05. 2017

571돌 한글날을 앞두고

한글을 자유롭게 사용한 것은 50년 정도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옆에 국립 한글박물관이 있다. 2014년 한글날에 개관했다. 아직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곳 전시 콘텐츠는 놀랍다. 한글에 대한 전시 콘텐츠가 이렇게 빈약할 수가!! 하며 놀라게 된다. 
전국 박물관을 방문 관람하면서 참으로 상상력의 빈곤을 개탄했는데, 한글박물관은 상상력이 부족하다기보다는 전시할 실물의 절대 부족을 이해하게 된다. 한글을 사용한 100년 이상 된 유물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할 수 없이 해방 이후 발간된 국어 교과서들이 전시 품목에 들어갈 정도다. 각종 전란을 통해 소실(燒失)된 것과 일제의 의도적인 멸실(滅失)을 고려한다고 해도 참으로 빈약하다.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민초들이 일상에서 문자 사용을 거의 하지 않았을 거란 판단이다.
진중권이 독일과 한국의 문자 매체 사용이 300년 이상 격차를 보인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이상일 수도 있다. 모더니즘을 겪지 않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맞이한 것처럼 매체사적인 측면에서 문자시대를 겪지 않고 탈문자시대가 느닷없이 우리를 덮친 것이 아닌가 싶다.
한글은 15세기에 만들었다. 올 한글날은 571돌이다. 홍길동전은 17세기 초에 써졌고 양반가 규수들의 편지글은 18세기에서야 나타나고 잘 알려진 조침문은 19세기에 쓴 것이다. 민초들이 한글을 사용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 본격화된 것이라 보이고, 한글을 수단으로 읽고 쓰는 것이 일상화된 것은 해방 이후 공립학교의 증가에 따른 것이다. 1945년 문맹률이 90%라는 사실이 민중의 생활에 문자가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문자 사용에 대한 현대사에서 오늘의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OECD에서 실질 문맹률이 가장 높다는 통계나 교육 불가능을 말하는 교실붕괴 현상, 출판업계의 불황, 한국 소설의 급격한 쇠락, 사회 전반적인 스토리텔링의 천박성은 한국에서 문자 사용이 전면화된 것이 60년 정도라는 현실에 있다.
일본의 예가 반대 상황을 말해준다. 일본 가나의 발명은 한글처럼 명확한 사료가 없지만 10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나로 쓴 천 년 된 여염집 아낙의 일기가 드물지 않으며, 오백 년 이상된 가나 문서는 너무나 흔해 모두 학문적으로 접근할 수도 접근할 필요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매체로서 문자를 얼마나 자유롭게 사용했는가는 자생적 문화의 질을 결정한다고 본다. 한국이 고유문화를 발굴하기도 계승 발전하기도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민중의 정치적 감수성이 빈약한 원인도 마찬가지다. 일상에 문자가 중심에 있지 않았을 때, 일제강점기나 해방 정국에서 우리 민중의 정치적 감수성(계급의식이나 자주의식)이 현저히 높았으나 학교의 보급과 문자 사용이 생활의 중심에 놓이면서 연대와 소통의 단절을 겪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텍스트가 중요하면 텍스트를 잘 다루는 지식인 집단이 정치적 어젠다(agenda)를 독점한다. 민중의 문자문화가 자유롭다면 사기꾼 지식인이 정치 행위를 독점할 수 없을 것이다. 콘텍스트(context)에서 “con-”이 떨어져 나가면서 텍스트는 스스로 독립한 것이 아니라 고립되었을 뿐이다. 예를 들어보면 명확하다. 지금 한국에서 ‘출구전략’이나 ‘재정절벽’ ‘양적완화’ ‘오픈 프라이머리’를 이해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 될 것인가. TV 뉴스에서 흔히 나오는 용어가 텍스트에 갇히면 민중의 머리에 공유되지 않는다. 훨씬 더 쉽게 이해되는 용어를 쓸 수도 있는데 언론은 일부러 어려운 말을 사용한다. 반대로 학교는 낮은 수준의 어휘만을 다루는 형편이다. 이것은 매우 전략적이다.
사실문제는 그다음이다. 아무리 문자 매체의 사용이 역사적으로 빈곤하다고 해도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생존과 연결돼있다.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다. 문제의 발생이 성숙하지 못한 문해력에 있다고 해서 과연 텍스트 중심 사회의 건설에 해결 열쇠가 있을까? 그렇지 않다.
쓰나미로 인한 바닷물 범람은 해안가에 마련된 대피소로 일시적 피신을 하면 되지만 우리의 현실은 빙하가 녹아서 상승한 해수면과 마주하고 있다. 해수면은 점점 높아지는 상황이다. 결국 바닷물이 제방보다 높아지는 순간 대피소의 의미는 사라진다. 대피할 시간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해수면 상승은 필연적으로 해발고도가 높은 지대의 새로운 서식지 건설을 요구한다.
아직은 텍스트가 가장 주요한 매체로 작용하지만 곳곳에서 해수면 상승과 같은 전방위적 혁명적 변화를 감지한다. 이미지와 사운드, 비디오가 IT와 공진화하면서 텍스트를 밀어내고 미디어 중심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빌렘 플루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디지털 매체의 등장은 탈역사 시대로 전환하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원인과 결과가 고정적인 역사 시대에 비해 탈역사 시대는 출발점과 경유지, 도착점이 시간을 벗어나 비선형적 구조를 가진다. 2층을 먼저 짓고 1층을 나중에 짓는 상상이 가능한 스토리텔링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과연 문자 매체의 역사 시대를 충분히 다지지 않은 한국 사회가 디지털 매체의 탈역사 시대로 진입하여 건강한 생태계를 꾸릴 수 있을 것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종이 신문을 열심히 보지 않은 사람이 하이퍼텍스트를 지향하는 인터넷 신문을 읽을 것인가와 같은 질문이다. 텍스트를 통한 리터러시 능력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 디지털 매체를 통해 정보 유통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을 하고 실제로 대중이 디지털 매체로 쌍방향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느냐에 한국 사회의 미래가 달렸다고 생각한다. 즉 한국사회의 문화적 후진성을 극복하고 양극화 문제와 불평등한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 열쇠가 디지털 매체를 평등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단순히 웹 서핑을 하거나 인터넷 게임을 즐기는 것은 소비자로만 자리매김되는 것이라 평등하다고 볼 수 없다. 매체의 평등권은 매체를 이용한 콘텐츠 생산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느냐에 있다. 
교육혁신의 고갱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피교육자가 디지털 콘텐츠의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프로슈머가 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용품을 오브제로 예술품을 만드는 것이 지금까지 교육과정이라면, 거꾸로 창작예술품을 일상에 배치하여 생활용품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프로슈머를 지향하는 미래의 교육과정이다. 당연히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구분이 흐려질 것이며 교육현장의 공간과 시간의 배치도 파격적으로 재배치돼야 한다. 
혁신적 교육과정의 중심에 피교육자의 스토리텔링 창작이 놓이지만 다양한 IT 기기와 3차원 디지타이저와 3D 프린터 등의 혁명적 입출력 장치의 사용은 필수적이다. 문명의 기술적 진보를 고려하지 않고 미래를 설계할 수는 없다. 프로슈머가 서술된 <제3의 물결>에게는 수십 년 후의 미래지만 지금 우리는 현재로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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