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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Aug 23. 2017

부채감만이 전달 가능하다

다다르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정도가 교사의 힘

운동장 벤치에서 한숨 돌리고 폰을 들여다보는데 아이 하나가,
"이 휴대폰 중독자야"라고 말한다.
어쩌면 나도 중독인가....
짧게 반성하는 찰나가 지나고, 그가 내 옆에 앉아서 끊임없이 욕을 뱉어내고 있었다는 걸 상기한다.
욕하는 틱은 아니라는 확신에 고쳐보려고 다양한 시도를 했다. 지난 1년 동안....
교사로서 가장 당황스러운 건 부정적인 모습이 더욱 강화되는 것이다. 고치려고 했던 성향이 줄기는커녕 더 늘어났다니.... 혹시나 내 실수나 판단 착오가 원인제공은 아닐까 싶은 당혹스러움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아이의 욕설에 자존심이 상하거나 기분 나빠지는 점은 없다. 새가 지저귀 듯 옆에서 욕을 연발하는 아이의 심리엔 "같이 놀자"는 요구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다만 그가 성인이 돼서(가깝게는 공교육에 복귀해서) 무시당하거나 공격받는 일이 뻔하기에 미연에 고쳐야 한다는 판단이 있던 게다.
오늘 아침 불현듯 올라오는 생각이 있다. 내가 욕하는 아이를 욕하지 않도록 고치려는 배경엔 욕하지 않는(욕설을 조절하는) 나 자신의 우월감이 작용한다고 판단했다.
우쭐대는 얕은 감정이 아니라 내가 돌보는 아이(학생) 보다 교사인 자신이 우월한다는 판단은 당연한 것이었다. '넌 잘못된 것이고 내가 올바른 미래의 목표를 보여주겠다' 이런 기본적인 마음 가짐이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게 올바른가. 아니 올바름은 모르겠고 과연 효과적인 기본자센가.
오래전부터 부정적인 모습의 아이들은 디지털 세대가 보여주는 권위에 대한 조롱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내용으로 에세이를 써왔다. 욕을 하는 만 나이 9세 소년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아이들은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가 랜덤으로 얽혀 있다. 과거니 미래니 하는 말이 근대와 함께 성립된 것이라 탈근대의 정점에 서있는 현재 아이들에게서 과거와 미래가 소거된 것은 충분히 이해 가능한 것이다. 
시간이 얽혀있다는 건 우선 나이가 주는 권위의 해체를 말한다. 아이의 눈에는 난 언제나 "꼰대삽질대마왕"일 뿐이 아니겠는가. 아이가 나에게 의지하는 건 의식주 기본 삶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게 다다.
다다르지 못함에 대한 갈망이 학력이라 표현하는 우치다 타츠루의 설명에 공감했다. 부채감이 삶의 동력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우치다 타츠루에게서 전수받은 것이다. 나는 이런 추상적 아포리즘을 실제 아이들과 접점에서 현실태로 만드는 것이 임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나 참으로 미천하기 짝이 없고 미련하기 그지없다. 
욕하는 아이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 아이의 삶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개연성이 내 빚의 총량이다. 미래의 개연성 이전에 현재 삶도 아이는 버겁다. 그 또한 추가적인 빚이다. 비록 나는 고생한다는 위로의 말을 듣고 있지만 나름 향기 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내 삶의 안락함이 내가 돌보는 아이의 미래의 불편함과 불안함을 배경으로 한다는 부채감이 있다. 

그 빚을 어떡하든 갚아가겠다는 마음가짐만이 가닿을 수 있지 않을까.

끊임없이 심한 욕을 해대는 아이에게 말이다. 그것 말고는 모두 '한남충개저씨꼰대'의 잠꼬대를 벗어나지 않는다. 나로선 좀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시대를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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