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준규 Oct 18. 2017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죠

손지연 공연을 보고

흔히 43년 생 조니 미첼에 비교되는 손지연은 43살이 되었습니다. 
앎이 경험을 넘어설 수 없는 법. 지난 8월 초 부산에서 처음 손지연을 만났을 때 어려서 라디오에서 자주 들었던 나나 무스쿠리가 떠올랐지만 조니 미첼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조니 미첼이 만들고 부르기도 했던, 그러나 쥬디 콜린스 목소리로 더 알려진 <Both sides now>을 들어보니 ‘아~ 이 노래’ 싶습니다. 목소리는 손지연이 더 맑습니다. 
어제 방이동에서 손지연의 공연이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내 일터에서 걸어가도 될만한 거리에 있는 LP카페에서 손지연 공연이 있다고 하니 일종의 의리감이 발동해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입니다. 가수가 노래를 하고 관객으로서 감상하는데 ‘의리감’은 어떤 좌표를 가질까요. 관람동기로서 의리감은 노래를 들으러 간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러 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상대로 손지연은 공연 전 술을 마셨고(내 앞을 지나가는데 술냄새가 풍긴다) 공연 중에도 계속 맥주를 마셨습니다. 술기운은 노래를 풍성하게 하지만 관객과 대화에서는 발음이 불분명했습니다. 후반부에는 주최 측이 맥주 대신 생수를 제공했고 손지연은 살짝 아쉬움을 날리는 멘트를 하기도 했습니다. 카페 헤세이티의 황 시인이라면 끝까지 맥주를 제공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가수의 발음이 뭉개질 때마다 매니저나 가족이라도 된 듯 조마조마하더군요. 
내 동기나 마음과 관계없이 <거절> <실화>는 대단한 곡이고 손지연은 엄청난 절창을 보여줬습니다. <The water is wide> <Stand by me> <Oh Dany Boy>도 손지연 식 해석이 “러블리”합니다.
찬조 가수가 노래를 부르려고 준비하는 중에 주최자가 마이크로 당부의 안내를 합니다. 관객의 관람 태도를 문제 삼으며 화를 낸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러니 관객 분들이 공연 중 집중을 흐트러지게 하는 행동을 삼가 달라는 멘트입니다. 주어를 잘못 듣고 ‘불쾌해한다’는 술어만 들어서 불쾌하게 생각하는 주체가 손지연인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 관객이 공연장 분위기에 항의하며 퇴장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제 오해는 의리감의 관람동기와 결합하여 상상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손지연은 관람에 집중하지 않는 관객에게 불쾌감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맥주를 계속 마시면서 노래를 하는 손지연이 술을 더 많이 마시고, 취기에 돌발적인 멘트나 행동을 할 수도 있다. 급기야 가사를 잊거나 기타 코드를 엉망으로 연주한다. 무대에서 화를 내고 일방적으로 공연 중단을 한다. 

뭐 이런 엉뚱한 스토리를 짜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생각은 제 머릿속에서 굴러간 것이고 현실에서 공연은 깔끔하게 마무리됐고 손지연은 팬들과 친절하게 인사를 나누고 사인을 해주었습니다. 
혼자만의 스토리텔링은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와 하이퍼링크되고 알코올홀릭으로 죽음으로 달려가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워킹걸에게 부축을 받으며 수영장을 떠나는 장면이 튀어나왔습니다.(이 모든 이야기는 손지연이나 손지연 공연과 전혀 관계없다. 손지연과 관계없는 새로운 이야기로 넘어간 것이다)

내 경험이 내 생각을 구성하고, 내 생각이 날 구성한다. 그리고 내 행위가 구성되고, 행위는 경험으로 쌓인다.

 이건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 루틴입니다. 이런 루틴이 제게는 모더니즘 분위기에서 돌고 돌았습니다. 비록 한국 사회가 모더니즘을 정상적으로 경험하지 못했지만 7~80년 대 학생으로 살았던 저는 3~4차 교육과정을 지나왔고, 이놈들은 모더니즘의 자식입니다.
로고스는 너무도 당당하게 파토스의 숨통을 눌러댔고, 중학생이 되어 알게 된 수음이 부끄러워 '내가 이중인격자임에 틀림없다'며 자학이 일상화됐고, 처녀 선생의 알몸을 상상한 것만으로도 천하의 패륜아가 되었습니다. 책상 줄은 언제나 일직선이어야 하고 월요일 아침 운동장 조회 때 줄이 삐뚤어졌다고 지적당하는 아이들에게 경멸의 눈길을 보냈으며 기름밥 묻은 작업복 입은 아저씨를 루저라고 무시했고 책꽂이에 거꾸로 꽂힌 책의 글씨가 다 흘러내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시험기간에 시험공부 말고 할 수 있는 건 없었으며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했고 내가 부모에게 효의 덕목을 실천하는 것에 갈등이 없었습니다. 엉덩이에 작렬하는 선생님의 대걸레 자루에게 자동으로 화끈한 고마움을 느꼈고,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은 야만인이나 하는 것이고 졸음에 지는 것은 내 미래를 망치는 일이었습니다. 하물며 술에 취한다는 것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이니 모더니즘敎에서는 죽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죽는 것은 깜깜한 암흑이며 더럽고 냄새나며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돼 영원한 독방입니다. 당연히 가장 두려운 놈입니다. 그야말로 끝장입니다.
하지만 천만다행스럽게도 나이를 먹었고 덕분에 저는 모더니즘敎에서 탈퇴하였습니다. 혹여 이것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또다시 프레임을 만드는 것은 끔찍한 일이며 보이는 않는 세력(때론 잘 보이기도 하는 놈들)에 의한 공작일 것입니다.
손지연은 내 걱정 위에서 노래했습니다. ‘위(over)’라기보다는 ‘넘어서(beyond)’가 맞습니다. 제가 모더니즘에서 벗어난 것도 그놈의 이성의 작동입니다. 운지법 종이 설명서를 펼치고 더듬더듬 리코더를 부는 것이 나라면 손지연은 코드 없이 기타를 두드려대는 듯했습니다. 내가 리코더 구멍을 잘못 막으면 삑사리가 날 테지만 손지연의 자유로운 손가락은 통째로 연주가 되었고 그의 노래는 음정을 고려한 패턴의 고민과 상관없는 세계에서 날아왔습니다. 
시간에 질서를 입힌 것이 음악이라 했지만 손지연의 질서는 무질서와 한 몸으로 세상에 없는 질서를 만듭니다. 가녀리다고 말하기조차 힘든 비쩍 마른 그의 다리도 몸에 대한 세상의 질서에 똥침을 날리는 또 다른 질서를 말합니다. 공연 중 마시는 알코올도 손지연이 여는 우주에 포함되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그의 질서가 조명을 받아 환하게 빛나지만 무대 아랫사람들의 질서에 대해 시비를 걸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손지연의 우주는 쉽사리 공격당할 수 있습니다. 그의 질서는 몽니를 부리는 것도 아닙니다. 무대 아랫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가슴 먹먹함을 공유합니다. 보이지 않는 그의 목소리가 ET의 긴 손가락이고 영화 아바타의 나비족 여전사의 머리카락입니다. 저쪽 우주와 이쪽 우주의 소통 통로인 것입니다. 
그때 머릿속 전구에 불이 들어왔습니다. 모더니즘과 우리 아이들의 상관관계는 어떤가. 서양의 300년 전 모더니즘이 일본 제국주의로 덧칠되고 전후 열강의 신질서 속에서 우리에게 강제 이식됐습니다. 그리고 '나'를 숙주로 50년 동안 기생한 것인데 우리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침투했을까 생각합니다. 한 번도 제대로 모더니즘을 구현하지 못한 한국사회가 교육과정만큼은 모더니즘의 자식으로 기능했습니다. 지금 아이들은 모더니즘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한국사회의 봉건성과 관계없이 교육과정이 모더니즘을 지나쳐 디지털 문명의 아류로서 탈텍스트와 탈역사, 변칙적으로 디자인된 구성주의의 영향 속에서 나서 자랐습니다. 
돌잔치에서 마우스와 마이크를 잡았던 아이들은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노스페이스 잠바를 입으며 TV에도 관심 없이 삼성 스마트폰을 쥐고 20대의 자기 자동차로 아우디를 지목하지 못하면 낙오자로 자리매김하는 분위기입니다. 이런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이성의 질서를 주문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표현을 나라님에 대한 불충이라고 누군가 지적했을 때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자기를 유보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공질서를 앞세우라는 꼰대의 지적을 본능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의 질서 밖에 있는 아이들과 먹고 자는 일이 제 직업이다 보니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아이들을 이해하고 돌파구를 마련하는 고민과 닿아있습니다. 특정한 색을 아주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주변이 내가 보고 있는 색깔의 보색으로 보입니다. 주변의 보색은 실제 색깔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내가 보고자 하는 물체의 색을 가까이서 집중하면 나타나는 허상입니다. 좀 떨어져서 보면 주변의 보색도 사라집니다. 우리 아이들을 높은 시좌에서 조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아이들 주변에 있는 보색의 허상을 진상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주어진 조립 설명서대로 자신을 구성했는데 일상의 권력을 지닌 어른들이 못된 놈이거나 정신과 환자로 취급한다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죠?”
한국에서 손지연의 대중적 인지도가 미국에서 존 바에즈나 조니 미첼의 경우만큼 올라가면 우리 사회가 비로소 모더니즘을 완성하고 모더니즘 이후 세상을 기웃거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조니 미첼과 손지연이 딱 30살 차이라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 청소년들은 이미 30년 후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 그들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손지연 공연 때문에 켜진 내 머릿속 전구의 불빛이었습니다. (2015.10.18)
https://youtu.be/M2A3yq9D41c

매거진의 이전글 과잉보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