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진과 이성으로부터 달아나기
#봉화에서50일
#7월18일
#에필로그
#깊은감동
#자폐스펙트럼
1.
종일 현관문을 한번도 열지 않았다. 밖으로 한발짝도 나가지 않았다는 말이다. 무서워서, 햇볕이 무서워서 나갈 수가 없다. 기거하는 집이 한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어두워 더듬거리게 될 정도로 볕이 들어오지 않는 구조다. 염천에는 이 구조가 조금 도움이 된다. 그래도 봉화라서 공기질은 아주 좋다. 환경부 공인 공기질 1위 지역이니까.
2.
아이들이 온순하다. 온순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참..... 정확히 말하면 내가 온순해졌기 때문이다. 사납게 다그치지 않으니 아이들도 고분고분 말을 잘 듣고,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다.
인간에게 "객관적"은 없다. 내가 변하면 세상도 변한다. 당연하다. 오직 주관만 있을 뿐이니 기준이 변하면 당연히 측정치가 따라서 변할 수밖에.
3.
내가 편안해진 것은 최근 이어지고 있는 오티즘(자폐증)에 대한 고민 때문이다. 실제 자폐라고 볼 수 있느냐, 없느냐를 넘어 신경질적이고 원만한 대화가 어려운 어린이청소년들을 일단 자폐 스펙트럼 장애 아이들이라고 생각해보면 조급함이 사라지는 신기한 경험 중이다. 10년 전에 만난 초5 아이가 공포를 느낄 수록 크게 웃는다는 걸 발견한 이래로 인식의 지평을 기저부터 뒤흔드는 경험이다.
사실 퇴직 후 일 년에 두 세번 정도 강연을 할 때 토해낸 말들을 대부분 거둬들여야 할 불편한 발견이다. 나는 엉덩이에 뿔난 아이들을 뇌의 문제로 보는 걸 매우 경계했었다. 그래서 약물투여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것이고, 실제로 함께 지내는 아이들이 나를 만나면서부터 투약을 끊었다.
4.
일단 뇌의 문제로 본다. 뇌의 가소성(뇌세포와 뇌부위가 유동적으로 변하는 것을 뇌 가소성이라고 한다. 뇌 가소성 때문에 학습이 가능하고, 손상된 뇌가 되살아날 수 있다)에 대한 믿음은 전과 같다. 그러니까 새롭게 투약이 필요하다는 게 아니다. 내 경우에 아이들의 문제를 '인지'라는 영역으로 국한해서 생각했다. 인지의 '증진'을 '이성'으로 해결해보려고 한 것이다.
일테면 아이가 감동감화를 받도록 내 역할을 세팅했고, 그러려니 내가 말을 많이 하게 됐고, 달변이 교사의 훌륭한 덕목으로 생각하게 됐고, 따라서 교사의 학습이 중요했고, 무엇보다 언어가 중요했다.
5.
다시 말하자면 나는 '증진'과 '이성(理性)'으로부터 탈주를 시작한 것이다.
6.
탈주의 동기는 단연 에두아르도 콘이 쓴 <숲은 생각한다; How Forests Think>와 루퍼트 아이잭슨이 쓴 <The Horse Boy> 두 권의 책이다.
7.
아이들을 인지적 측면에서 '증진'시키는 작업이 교육과정이라거나, 내 인위적 작업을 통해 아이의 '증진'이 가능하다는 믿음에서 벗어난 것이다. 또한 '이성(Logos)'이 아이를 자유케 할 것이란 맹신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과거에도 같은 생각을 유지했지만 진정으로 존재론적 전회(轉回)를 맞이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러니까 증진을 해체하고 로고스의 여집합(파토스나 에토스를 넘어선 그 무엇)에서 놀기로 했다는 것이다.
8.
거슬러 올라가면 8년 전에 카자흐스탄과 인연을 맺으면서부터다. 아주 아주 우연히 카자흐스탄을 알게 됐다. 몽골 사람은 한국 사람과 구분되지만, 카작 민족은 말 없이 서 있으면 한국인과 구분되지 않았다. 고대 카작인과 훈족, 투르크, 스키타이, 김일제, 신라 금관의 키워드는 서로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었다.
어쨌든 중앙아시아와 한반도의 강한 연관성에 나도 모르게 끌려들어갔다.
미국인 아이잭슨(영국인이기도 남아공 사람이기도 하다)이 자폐아 아들을 몽골 무당들에게 데려가서 치료하고 곧바로 부정적 행동을 확실하게 멈췄다는 보고서를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기운이 나를 감싸는 걸 분명하게 느낀다.
9. 기록을 위해 <The Horse Boy>의 한 부분(p.288)을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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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사람들이 샤머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 어떤 것일까? 어떠한 합리적인 설명도 허용하지 않는 이것은 논리에 의해 정당화되거나 변호될 수 없는 것일까? 그저 환상일까? 이 여행은 환상에 대한 탐닉에 불과한 걸까? 확실히 그것은 나의 모든 서구적인 조건들을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있었다. 가파른 숲길을 내려가면서 생각했다. 어째서 서구에서는 합리성을 그토록 숭배하는 걸까? 합리성이나 과학에 똑같은 근본주의적이고 강박관념적인 방식을 적용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전에 종교에 적용했던 방식이 아니던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것은 이단이라고 내치지만, 우리 삶에서 그렇게 많은 부분들이 합리적이거나 과학적인 용어로 한정할 수 없는 것들에 의해 좌우된다. 예를 들어 사랑이 그렇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경험하고 그걸 염원하며 자기 자신의 삶을 위하여 그것을 필요로 하고 그것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을 물리와 화학으로 쪼갤 수는 없다.
우리는 회의적이지 않으면, 돌팔이 의사들과 가짜 약장수들과 성직자들과 독재자들의 먹이감이 된다. 우리는 쓰라린 경험을 통해, 어떤 것이 우리의 경험 밖에 놓여 있으면 그것을 불신하거나 우리의 경험이 그것을 믿을 수 있다고 증명해줄 때까지는 적어도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옳다는 걸 안다. 우리는 어떤 것들은 쉽게 설명할 수 있지만 어떤 것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걸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경험의 회색 안개 속에서 비틀거린다. 그게 삶이다.
로완(자폐증 아들; 몽골 무당을 만난 후 상태)이 말했다.
"나무들을 봐요. 나무들이 행복해요."
그의 목소리에는 경외감이 묻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