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천천히 가야 하나, 니가 빨리 가야 하나
#봉화에서50일
#7월26일
#숲을볼수있으려면숲을나서야한다고
1.
돌아가신 어머니는 26년 범띠인데, 내가 서른이 될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서른 살을 축하한다. 애 아빠도 됐으니 진짜 어른이 되었구나. 살아보면 점점 세월이 빨리 갈 거다. 아직은 빠르다는 걸 모르겠지만 50이 되면 정신이 없을 거야. 그러니 60이 넘으면 거의 정신줄을 놓는 거지."
아직 정신줄을 잘 잡고 있지만 긴장하지 않으면 시간의 늪에 빠질 것 같다.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시간은 비웃듯 획 지나가더라.
2.
지난 월요일 대학 동기 회동 자리에 갔다. 이 친구들은 믿을 만한 현직 교사이고 최소한 비난을 받을 선생이 아니지만, 모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더라. 학폭 문제나 학부모와 소통과정에서 주도권을 잃은 건 물론이고, 자신을 변호하는 모습을 스스로 돌아볼 때 자괴감에 한없이 작아진다는 얘기를 하더라. 과거에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커다란 패러다임의 변화를 증언하는 현상이라고 본다.
3.
오늘 아침 앱으로 뉴스공장을 듣다가 전화기를 만지지 못하고 그대로 뒀더니, 다음 프로그램의 오프닝으로 이런 멘트를 날리더라.
"숲을 나서니 숲이 보입니다."
일견 타당하다. 거시적 안목만 있을 순 없지만 거시적 안목은 필수다. 숲 속에서 숲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숲 전체를 꼭 봐야하는가? 숲을 나와 숲을 봤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래서 어쩌라구? 뭐 이런 질문이 뒤따른다.
숲을 정확히 바라보자는 말은 매우 근대적이다. 동시에 포스트 근대에서도 유효한 주장이다. 과학적 합리주의 시절도, 합리주의에 반기를 든 시절에도 숲을 조망하려는 의지는 옳은 입장이었다.
전대미문의 시절이 우리 앞에 있다. 아이들과 청년들은 말한다.
"우리는 숲이 어떤지 볼 생각이 없는데요. 숲 전체를 파악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제 옆에 있는 전나무 군락지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어요. 전나무는 제가 필요한 모든 것을 주고 있거든요. 숲 전체에 무엇이 있고, 누가 살고 있는지 관심이 없어요."
4.
아이들과 검정고시 이후 8박9일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급하게 준비하려니 항공권, 숙소, 특히 렌트카 모두 쉽지 않다. 휴가철 극성수기라서 렌트카가 모두 동났다고 한다. 차량이 없으면 여행은 매우 밀도가 떨어진다. 짧은 여행이다보니 마냥 성글게 시간을 보낼 수는 없더라.
하지만 아이들과 나는 다른 시간 속에 산다. 나는 시속 50km로 달리고, 아이들은 시속 10km로 지난다. 내가 문제인가, 아이들이 문제인가. 내가 멈춰야하나, 아이들이 빨리 뛰어야 하나.
멈추고 싶어도 멈춰지지 않고, 아이들을 아무리 채근해도 빨리 달리게 할 수 없다. 이게 비극의 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