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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Jul 28. 2017

찬스 카드

아끼다 똥 될까 걱정되는 당신에게

  2008년 1월이니까 거의 7년이 흐른 얘기입니다. 

  나가기만 하면 1등 상금 5천 만원이 내 것 같아서 만만하게 보고 퀴즈 프로그램 출연 신청을 했습니다. 지금도 방송 중인 KBS2TV <1대 100>에 2008년 1월 출연했습니다. 방송은 3월 초에 됐습니다. 함께 문제를 푸는 100명이 다 틀리고 나만 끝까지 살아남으면 5천 만원의 상금을 타는 규칙입니다. 주관식이 아니고 3개 보기 중에 하나의 답을 고르는 방식이기에 더욱 자신만만했습니다. 두 번의 찬스도 나에게 유리한 제도니까 5천 만원은 떼놓은 당상이라 생각했습니다.

  여러 단계가 지나가고 상대편 100명 중 95명이 탈락한 상황에서 문제를 풀게 됐습니다.  답을 미리 볼 수 있는 찬스도 남았습니다. 제시된 문제는 20여 년을 매일 만졌던 분필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기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우승 세리머니를 어찌할 것인가만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답을 말했고, 오답으로 탈락했습니다.

  다음 날 <1대 100> 홈페이지에 나를 위로하는 듯 아닌 듯한 글이 올라왔습니다.

아끼면 똥 된다

  왜 찬스를 쓰지 않고 탈락했냐는 지적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찬스 미사용으로 머리를 뜯고 있는 참인데 상처에 소금 뿌리는 것입니다.

 

1대 100 43회에 출연한 필자

 아이들도 일상생활에서 자신에게 찬스 카드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카드를 적절한 타이밍에 쓰지 못해서 불이익을 당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아이들 교육문제의 핵심은 "불이익"에 있습니다. 불이익은 어떤 가치를 일컫는 말이 아니라 이익을 얻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불이익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불이익의 강조는 이익을 거머쥐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문제는 아이를 둘러싼 일상이 TV 퀴즈 프로그램과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세상이 방송국 스튜디오이고 퀴즈 참가자로 아이디가 형성됐습니다. 정답을 맞혀서 다른 참가자들을 쓰러뜨리고 우승 깃발과 상금을 쟁취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난 것으로 굳게 믿습니다. 물론 프로그램 PD가 누구일지 자명합니다.

  교사 입장에서 아이들에게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소용없습니다. 낳아주고 길러주고 사랑해주는 엄마 조차 PD가 배치한 스텝이거나 캐스트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트루먼쇼>가 우리의 일상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아이들에게는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어떤 걸 찬스 카드라고 생각할까요.

  자신이 칼자루를 쥘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면 찬스 카드입니다. 인터넷 게임과 같은 일상에서 찬스 카드는 구매력을 가진 아이템과 같습니다. 재화를 구매하거나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돈(재화 구매)과 명분(서비스 구매)입니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명분입니다. 돈은 가게에서 물건을 살 수 있을 뿐이고 스스로 적립할 수 있는 기회와 방법이 제한적이라 큰 관심이 없습니다. 반면 명분은 가족의 사랑을 요구할 수도 있고 부모를 통해 선물로 재화도 획득할 수 있는 만능카드입니다.

  보통의 아이들은 명분 만들기에 매우 예민합니다. 어른이 약속을 어기면 무척 미안해하는 것을 이용합니다.(자신이 약속을 어기는 것은 거론하지 않습니다.) 부모에게 양육의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이용합니다.(자식으로서 가족으로서 의무는 거론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무(개인위생, 등교, 학습, 비속어 사용 제한)를 방기 하면 부모가 궁지에 몰린다는 것을 이용합니다.(자신의 의무 방기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약점을 공개적으로 드러냅니다.(자신의 약점을 거론하면 엄청나게 흥분하고 화를 냅니다.) 다른 카드가 효력을 잃으면 자기 몸을 다치게 하는 일도 생깁니다.(대표적인 경우가 천식질환입니다. 어린이 천식환자의 절반은 사랑받고 싶은 심리적 요인입니다.)

  이런 환경에 익숙해지면 무조건 화를 내면 자신에게 명분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확실한 명분이 있는데 찬스 카드로 사용하지 않았다면 위 <1대 100> 경우처럼 머리털을 움켜쥐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아이가 찬스 카드로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한 것은 이익을 획득하지 못했으니 이미 불이익을 당한 것과 같아집니다. 불이익 상황은 게임에서 탈락하는 것이고 물리적 목숨이 끊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입니다. 아주 우울한 상황에 빠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확보한 찬스 카드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부모나 교사가 명분에서 밀려서 조금이라도 빌미를 제공한다면 아이는 매우 공세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공세적 자세의 일부분이 짜증을 내는 것이고 또 다른 일부분은 화를 토하는 것입니다.


  이런 아이의 자세가 바뀌지 않으면 개인적으로 불행할 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사회가 소돔이나 고모라 꼴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희망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위 경우에 들어맞는 아이는 생각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설득할 수 있습니다. 삶에 이익과 불이익이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하는 일과 연동된 것이 아니라고 알려줄 수 있습니다. 획득이 이익을, 상실이 불이익을 말하지 않으며 획득이 불이익을 상실이 이익을 주는 경우도 많다고 알아듣게 말할 수 있습니다.

  관건은 설득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설득하는 사람이 다르게 살지 않는다면, 설득하는 사람이 PD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면, 설득하는 사람이 스텝이나 출연진을 사퇴하지 않는다면 아이의 생각은 바뀌지 않습니다.


  만약 설득이 필요하다면 먼저 결단을 내리십시오. (201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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