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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Jul 31. 2017

프로이트를 소환해서 해명하다

두 방 사이의 문지기에 대하여

  중2 학생 3명과 단기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1월 과제로 선정한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우치다 타츠루, 갈라파고스)를 지난 주말에 함께 읽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고 하네요. 뭐 이름을 안다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은 아니지만 억압/무지('무식'과 구분되는)/수용/메커니즘 용어에 대해 어려워하기 때문에 멘토의 도움이 없이는 진행하기 어려운 책입니다. 아이들이 영민해서 용어는 간단한 설명만으로도 잘 알아들었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입니다. 구조주의는 20세기 초중반에 잉태되고 후반기를 휩쓴 현시기 대표적 철학 사조입니다. 한국의 남녀노소, 청와대 대변인부터 주류 언론인들을 거쳐 초중고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구조주의가 스미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구조주의를 꺼내기 위해 우치다 타츠루는 당연하게도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가져옵니다. 오늘을 말하기 위해 100여 년 전에 활약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프로이트에 대한 우치다 선생의 설명이 참으로 쉽고 명쾌해서 소개합니다. 왜냐하면 늘 말씀드렸던 (병명으로서)"ADHD는 없다"를 프로이트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일단 읽어보고 다시 오겠습니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우치다 타츠루, 갈라파고스) pp37-43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계급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생각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채로 생각한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자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생각하고 있는지 사고의 주체를 모른다는 사실을 가장 선명히 드러내어 보여준 것이 프로이트가 분석한 '억압'의 메커니즘입니다.
  어떤 심적 과정을 의식화하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단순하게 말하면 그것이 억압입니다. 프로이트는 이 메커니즘을 '두 개의 방'과 그 사이의 문지방에 있는 '문지기'라는 탁월한 비유를 통해 설명했습니다.
  '무의식의 방'은 다양한 심적인 활동이 펼쳐지는, 장터처럼 소란스러운 넓은 방입니다. 또 하나의 방인 '의식의 방'은 그보다 좁고 질서 정연하며 더러운 것이나 위험한 것은 주도면밀하게 배제되어 있는,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살롱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두 방 사이의 문지방에는 문지기가 홀로 일을 하고 있는데, 그는 개개의 심적인 흥분을 검사하고 검열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저지르면 살롱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정신분석 입문』).
  프로이트는 이 문지기가 하는 일을 '억압'이라고 불렀습니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것은 첫째, 우리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을 모두 의식할 수 없고, 의식화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심적 활동은 무의식으로 밀려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의식의 방'에는 문지기가 허가한 것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기제는 두 종류의 무지에 의해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문지기가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입실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를 선별하는 것일까 하는 점으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왜 문지기가 그곳에 있고 왜 검사를 하는가에 대해서입니다. 그 또한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나의 의식은 이 구조적인 무지에 의해 결정적인 방법으로 사고의 자유를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억압의 효과가 미치는 '무지'에 대해 알기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교겐[狂言](일본의 전통 연극 형식인 노[能]의 막간에 펼쳐지는 짤막한 소극笑劇이나 희극-옮긴이) 나오는 「부스」라는 이야기입니다.
  주인이 다로와 지로라는 두 사람에게 귀중품인 꿀단지를 맡기고 외출했습니다. 주인은 자기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두 사람이 꿀을 훔쳐 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 사람에게 꿀단지를 가리키며 그것이 '부스'라고 불리는 매우 위험한 독극물이니 절대로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처음 두 사람은 부스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무서워 겁을 냈지만 차츰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그들은 부스의 뚜껑을 열었습니다. 지로는 다로가 말릴 틈도 없이 그곳에서 나는 달콤한 향기에 이끌려 자기도 모르게 부스를 입에 댑니다. 그리고 부스가 꿀단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날름날름 꿀을 먹기 시작했고 꿀단지는 순식간에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다로는 꾀를 내어 주인이 끔찍하게 아끼는 두루마리 족자를 찢고 그릇을 깨뜨렸습니다.
  집에 돌아와 엉망이 된 집 안을 보고 깜짝 놀란 주인에게 다로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주인님이 집을 비운 사이에 잠이 들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둘이서 씨름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와중에 집안의 귀중품을 이렇게 망가뜨리고 말았습니다. 이래서는 주인님을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고 둘이서 부스를 먹고 죽음으로써 사죄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먹어도 죽어지지가 않아서....."
  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는 '억압'이 어떤 메커니즘인지를 제대로 설명해줍니다.
  주인공은 다로입니다. 그의 앞에는 텅 빈 꿀단지, 깨지고 부서진 집안의 가보, 파랗게 질린 주인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양한 심적 과정을 나타냅니다. 다로의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는 '다로 전용의 문지기'가 앉아 있고, 그는 다양한 심적 과정의 단편 가운데 ‘의식화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단편’은 다로의 살롱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문지기는 이런저런 심적 과정 가운데 다로에게 불쾌하지 않은 정보만을 의식화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의식하면 불쾌해지는 심적 과정은 ‘무의식의 방’에 남겨둡니다.
  눈앞에는 부서진 가보와 텅 빈 꿀단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다로는(‘명령을 준수하기 위한 씨름에 의한) 가보의 파괴에 책임을 느낀 자살 시도’라는 충성스러운 이야기로 편집합니다. 실제로 일이 발생한 순서와는 다르지만 어차피 모두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타임머신이 없는 한 다로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 주인은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다로는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무질서하고 산만한 ‘단편’이 그곳에 있을 때 거기에서는 어떤 이야기라도 만들어 낼 수 있다, 자신이 창조한 이야기가 허위이고 주인이 상상한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그러나 다로의 완전범죄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교겐의 무대에서는 주인이 다로의 간계를 간파해 “집히면 가만두지 않겠어!”하고 뒤쫓으며 관객의 웃음과 함께 끝이 납니다. 어떻게 다로의 거짓말이 순식간에 탄로 난 것일까요? 이것이 억압 메커니즘의 핵심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문지기가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다로의 문지기는 ‘어떤 심적 과정’의 수용을 거부했고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다로의 실패로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로의 문지기가 입실을 거부하고 억압한 것은 다로가 거짓말쟁이에 충성스럽지 않다는 것을 주인이 알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다로는 스스로를 온갖 가능성을 고려하고 그것들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교활한 인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로가 ‘자기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주인이 알고 있을’ 가능성만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지요. 사실 우리는 이 다로의 구조적 무지에 대해 이야기가 시작될 때부터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꿀을 독이라고 말하며 속이려 했던 것부터가,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다로가 곧바로 훔쳐 먹을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주인이 알고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다로가 충성스럽지 않다는 것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처음부터 다로를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다로만이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그것은 다로가 마음속으로 주인을 깔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보다 우둔할 것이라 생각한 주인이 자신의 마음을 읽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주인이 자기보다 우둔했으면 ‘좋겠다’는 다로의 ‘욕망’이 영리한 그의 눈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즉 “‘다로가 어떤 사람인지 주인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다로는 모른다”라는 구조적 무지가 성립합니다. 이것이 ‘억압’이라는 기제의 마술적 장치입니다. 
  이 무지는 다로의 관찰력 부족과 부주의가 원인이 되어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로는 거의 전력을 다해서 이 무지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사수하고 있습니다. 무지한 상태가 유지되기를 절실히 욕망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살아 있는 한 반드시 억압의 메커니즘에 휩쓸리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심적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이 우리의 개성이나 인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다로의 거칠고 잔혹한 성격은 사실 그의 억압 때문입니다. ‘다로가 사악한 인간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라는 정보를 다로 스스로 못 보고 있다는 구조적인 무지야말로 다로의 사악한 인격의 성립을 가능하게 하니까요.
  우리는 자기가 개성이 풍부한 사람이며 독특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낀다고 믿지만 그 의식활동의 전체 과정에는 어떤 심적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눈을 계속 돌리고 있는 억압의 편견이 늘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교실 속 개구쟁이들은 다로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프로이트를 풀어쓴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의 설명만한 돋보기가 없기에 소개했습니다. 다시 말해 ADHD 소리를 듣는 개구쟁이들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억압 기제가 강력한 경우입니다. 하지만 '억압'은 누구에게나 적용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려운 말을 동원해서 그렇지 프로이트는 '인간이 남의 이목을 무척 신경 쓰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개구쟁이들의 만행은 구조적이란 것이고, 프로이트식 표현이라면 인간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것이죠. 이런 이야기는 최근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 <마미>와 관련이 깊습니다. (꼭 보시라고 권합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누구나 병원에 가 볼 정도로 심한 것은 아닙니다. 두드러지게 심한 아이들은 프로이트가 살았던 19세기 말이 아닌 20세기 말과 밀접한 관련을 보입니다.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이 크다는 얘기입니다.

  심하게 개구쟁이인 아이들을 다로의 예로 들어 말하자면 '정말로 씨름을 하고 물건을 망가뜨려서 부스를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고' 믿는 것입니다. 단순한 꾀로 지어낸 말이 아니라, 자신이 지어낸 가상의 이야기를 진짜라고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죽음으로 죄 갚음을 하려고 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이 독약이 아닌 꿀이었다는 것이죠. 주인이 불같이 화를 내도 다로는 마냥 억울할 뿐입니다. 주인이 죽음의 벌을 내린다고 해도 받아들일 태세입니다. 진짜로 죽으려고 했었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로(심한 개구쟁이)는 자기가 꿀단지를 비웠다는 사실은 사라지고 죽음으로 충성을 다하려고 한 자신을 몰라주는 주인이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이런 상황을 교실이나 가정에서 아이와 어른 사이에 일어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상황의 주도권을 아이가 쥐게 됩니다. 개구쟁이에게는 전략적으로 매우 유용한 방법입니다. 문지기에 의한 구조적 무지를 생존과 번식을 위한 진화된 자기기만(self-deception)으로 바라본 서술이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로버트 트리버스, 살림)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상대방 기만에 대한 도덕적 부담을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 자기기만-상대방을 기만하는 자신의 행동을 진심으로 부정하는 상태로 서술합니다. 그런 자기기만이 진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수긍이 가는 설명이지만 정말 무서운 서술입니다. 따라서 분석틀로 참고는 하겠지만 프로이트든 트리버스든 모두 받아들일 순 없습니다.

  일단 '화를 잘 내는 아이' '주변을 어지럽히는 아이'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 '공공장소에서 맘대로 행동하는 아이' '욕을 함부로 하는 아이' '옆의 아이를 괴롭히는 아이' '매우 이기적인 아이' '자기 물건에 집착이 심한 아이'들에 대한 이해가 먼저입니다. 또한 이해를 위한 설명이나 서술에 이미 해법(처방전)이 들어 있습니다. 

만약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면 송구스러운 표현이지만 위 글을 거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1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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