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라티노스

스페인카미노데산티아고 열다섯째날

by 박달나무

#스페인카미노데산티아고


#열다섯째날(2019.11.4)


1.


비에 흠뻑 젖은 날이다. 판초가 어린이용 3장이라 내게는 허리까지만 내려온다. 배낭을 가리느라 뒤집어쓰고 걸으니 바지와 운동화는 대책이 없다. 운동화를 작년 봄 스페인 올 때 구입했는데, 방수는 커녕 여름용 망사 재질이다. 더구나 바람이 세게 불어 정신이 없다. 비가 오면서 바람이 강하게 부니까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젖으면서 동시에 마르는 기현상이....^^


아이들은 불편하면서도 색다른 경험인 듯.... 나름 즐기면서 걷는다. 1시간을 걷고 쉬었다가 가자고 하니까 아이들은 그냥 계속 가자고 하는 거다. 나는 발이 젖으니까 걷는 의욕이 꺾였다. 모라티노스 작은 마을에 들어와 알베르게에 등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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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라티노스에서 묵으려는 건 아니었다. 9km 더 가면 사아군(Sahagun)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아군은 시티와 타운 사이의 큰 마을이다.


어제 만난 한국계 미국인 여성(캘리)의 영향이 컸다. 뉴욕에 산다는 40세 여성은 어제와 오늘 동선이 겹치고 숙소도 같아서 아이들과 대화하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너희 컴퓨터 게임만 하다가 끌려왔구나”


대뜸 우리 아이들에게 정감을 갖고 아는 척을 했다. 늘 친절하게 대해주고 “이 누나가 아는데 말이야~” 하며 말벗이 돼주었다. 아이들은 당연히 가까이 다가섰다.


어제 저녁 자리도, 오늘 저녁 디너도 같이 먹었다.


“네가 대전 산다고? 내가 중학생 때 대전엑스포 수학여행 갔었지. 아직도 있나? 대전 어디 사는데?”


캘리가 시하에게 물었다.


“카이스트 근처에 살아요”


“그래? 카이스트가 한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이야. 거기 가면 좋겠다”


“서울대가 제일 좋은 학교 아닌가요? 저도 카이스트 갈 생각 있어요”


시하가 카이스트 생각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 카이스트에 대해 늘 부정적으로 말했었다.


“너는 MIT? MIT 우리집에서 멀지 않아. 쉬운 대학은 아니니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누나도 늦게 미국에 공부하러 가면서 영어 때문에 고생했어. 영어가 중요해. 영어 공부 열심히 해봐”


이번엔 태호에게 말했다. 태호가 늘 MIT가는 게 꿈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발뺌을 한다.


“저 MIT 못가요. 저 영어 싫어해요”


“무슨 소리야. 아직 초등학생인데.... 금방 영어 잘 할 수 있어. 이제 한국어는 평생 잊어버리지 않아. 그러니 영어 공부에 집중하도록 해. 꼭 필요해”


나는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별로 거들 말이 없다. 시하가 또 몰랐던 말을 한다.


“우리 엄마아빠가 내년에 미국에서 일년 살면서 학교 다녀보면 어떻겠냐고 했어요”


이건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


“뭐? 금시초문인데... 그래서 뭐라 대답했어?”


“싫다고 했어요”


아이들의 촉은 아주 예민하다. 모든 아이가 마찬가지다. 누가 내게 곁을 내줄 것인지, 누가 권위가 있고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빠른 시간에 파악한다. 심지어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 조차 정확하게 가늠한다. 아이들은 캘리에게 집중하고, 캘리의 말을 수용한다.(반론을 펴지 않는다)


캘리가 10km만 걷고 모라티노스에 있는 호텔급 알베르게에서 묵고 사아군으로 가겠노라고 말을 하고 아침에 먼저 떠난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당연히 ‘호텔급’에서 자야한다고 싱글싱글 웃으며 얘기한다. 거기다 발이 젖어서(아이들은 방수화라 노프라블럼) 고민 끝에 모라티노스 알베르게에서 하루 머물기로 결정한 것. 오후 시간이 아주 지루했지만 비가 오후에도 간헐적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그만 걷기로 하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3.


아이들도 지루하니까 날 괴롭힌다. 이것저것 말을 걸고 묻는다. 영화 제목을 말하고 언제 나온 거냐고 묻는다. 최초의 모바일 게임이 뭐냐고도 묻는다. 테트리스 아닐까 하니 그건 모바일 게임이 아니잖아요 하며 태클을 건다. 이런 질문은 시하가 주로 한다. 어떤 건 시하가 답을 가지고 있는 질문을 하기도 한다. 몇 번 ‘로다주’를 언급했지만 매번 “노다주가 누구냐?” 되묻는다. 로보트 다우니 주니어, 아이언맨 주인공 배우다. 로다주가 몇 살이냐, 로다주가 아역 출신인데 처음 출연작은 뭐냐, 로다주 차기작은 무엇이냐 등을 묻는다.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대략 대답한다.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렇게 대꾸하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 된다. 그러면 곤란하다. “로다주는 한 45살인 것 같아. 보기엔 50대로 보이지?” 라고 하거나 “로다주는 5실에 아역으로 데뷔했는데 제목은 모르겠어. 검색하면 알 수 있겠지” 나는 로다주가 몇 살에 데뷔했는지 모른다. 내 대답은 콘텐츠의 정확성, 그러니까 팩트체크에서 당당히 통과할 수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아이가 내게 팩트를 요구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줄 어른이 필요할 뿐이다. (일기를 쓰면서 지금 검색하니 로다주가 5살에 데뷔한 게 맞네. 찍기 신공. 그러나 나이는 55살이다. ㅠ) 틀린 팩트라도 정성껏 대답하는 게 중요하다. 어떤 칭찬보다 아이들을 격려하는 일이다. 태호는 주로 마크(마인크래프트)나 양코대전쟁 같은 게임 얘기를 꺼낸다. 내가 전혀 모르는 세계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아는 척을 한다. 태호 세계에 대한 긍정이고 인정이다. 그 다음 다른 화제로 넘어갈 수 있다.


4.


말이 돌고 돌다가 ‘교활하다’는 표현이 나왔다. 옳다구나! 내가 아는 세계다^^


“얘들아, 교활하다는 건 남을 속여서 자기 이익을 챙기는 건데, 교활이 동물 이름인 거 아니?”


“네? 교활이란 동물이 있어요?”


“교는 개의 몸에 표범 무늬를 가지고 머리에 뿔이 난 상상의 동물이야. 아주 옛날 중국 사람들이 만들어낸 동물이야. 활은 사람같이 생겼는데 온몸에 털이 수북한 동물이지. 히말라야 설인을 상상하면 돼. 이 둘이 아주 꾀가 많았데. 호랑이가 자기를 잡아먹도록 유인해서 호랑이 뱃속에서 내장을 파먹어서 호랑이를 죽게 만든다는 거야.”


“일종의 옛날 이야기네요”


“그렇지.... 비슷한 얘기가 또 있어. 낭패도 낭과 패라는 각기 다른 두 동물을 말해. 블라블라~~~”


이렇게 내가 얘기하면 아이들이 잘 듣는다. 하지만 이것 또한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나와 관계가 돈독하기 때문에 들어주는 척 하는 것이다. 가까이 사는 가족이나 부부의 대화도 들어주는 의지가 중요하지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 들어주겠다는 뜻을 상대에게 전달했을 때 상대는 말을 하기 시작한다. 방향성을 가지고 말하기가 사랑의 본질이다. 말하지 않는 사랑은 없으며, 방향성 없이 공중에 퍼지는 말도 사랑과 거리가 멀다.


5.


지루한 오후 시간을 알베르게에 딸린 레스토랑에서 주로 보냈다. 밖은 비가 오고 침실은 캘리가 누워서 쉬고 있기 때문에 실내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놀면서 사진 찍었달라고 한다. 특히 태호는 드문 일이다. 자신을 찍어달라는 주문은 마음의 평화가 강처럼 흐를 때이다. 둘 다 아주 예쁘게 잘 찍혔다. 태호도 크게 만족하며 좋아한다. (웬만하면 사진 확인하고 지우라고 고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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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상당히 선명한 무지개를 봤다. 일곱 가지 색깔이 확실하게 구분되는 무지개다. 아이들과 무지개를 같이 찍은 것도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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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스페인 아침 뉴스쇼에 세월호 추모 리본을 가슴에 단 사람이 인터뷰하는 모습이 보여서 일단 사진으로 남겼다. 바르셀로나가 카탈루냐 지방의 중심 도시다. 카탈루냐는 오랜 독립국이었다. 독재자 프랑코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스페인의 일부로 살고 있다. 여전히 독립을 꿈꾸는 카탈루냐는 세월호 추모리본을 카탈루냐를 위해 희생된 사람들의 추모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2011년에 카탈루냐 국제상을 받는 자리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 연설을 읽어보시라 권한다. 구글에서 “카탈루냐 무라카미”로 검색하면 연설 전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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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스페인 대평원에는 해바라기도 많이 재배하더라.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라 해바라기 밭은 을시년을 넘어 괴기스럽다. 죽어서도 태양을 향해 고개를 숙인 해바라기가 특별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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