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카미노데산티아고 열여섯째날
#열여섯째날(2019.11.5)
1.
"문제를 초래한 사고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법이다." 아인슈타인이 한 유명한 말이다. 이 말의 정당성을 역사가 증명한다. 언제나 새로운 사고와 관점이 얽힌 문제를 해결하고 새 시대의 문을 열었다. 수학의 역사라면 적나라하게 아인슈타인의 말을 증명한다. 또한 하이델베르크도 스승인 닐스 보어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
“선생님, 낡은 사고로는 낡은 세상만 볼 수 있습니다”
문제가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호주에도 살고 스페인 카미노를 걷기도 한다. 오늘 걸으면서 “문제를 초래한 사고방식”을 화두로 삼고 걸었다. 우리에게 문제를 초래한 사고방식이 무엇인지부터 확인하고서야 문제해결의 위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정립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정리되는 게 아니라 방 안에 콩과 팥을 한 말 씩 부어놓은 것 마냥 어수선하기만 하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문제를 초래했다는 생각까지 도달하고 더이상 진척이 없다. 과연 문제란 해결을 전제로 한 개념인가.
2.
캘리가 아침에 일어나자 태호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층침대 아래에 캘리가 자고 위에 태호가 누웠다. 태호의 선택이었다. 내가 금방 잠들어 상황을 알지 못했다. 태호가 계속 뒤척이고 한숨소리를 내다가 아래 바닥에 내려와 뒹굴렀다는 거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목이 말라서 그런다고 하길래 선생님을 깨워서 물 달라고 하라고 했단다. 태호가 날 흔들어 깨워 목마르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때 내가 시계를 봤는데 12시반이었다. 3시간 이상을 자지 못하고 끙끙거린 거다.
이런 일은 태호가 심한 각성 상태에 놓였다는 얘기다. 각성을 유지하는 자극이 지속된 결과다. 자극원은 캘리가 맞을 것이다. 캘리가 한국인이란 점, 지금은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살고 있다는 점, 자기에게 친절하게 말하고 격려해준 점, 여성이란 점, 누나라고 불렀지만 엄마의 느낌이 있다는 점 등이 작용했을 것이다. 반대로 남성이거나 한국어 소통이 어렵거나 자기에게 특별한 관심(MIT대학에 갈 수 있다. 용기를 내라)을 보이지 않았다면 침대에서 금방 잠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캘리가 뒤척이는 태호에게 소리내지 말라는 주문을 했다. 캘리의 제지명령은 태호에게 상대방의 반가운 반응이지 부정적 피드백이 아니다.
‘태호의 뒤척임으로(이층침대라 작은 움직임도 느껴진다) 잠을 이루지 못한 캘리’라는 상황은 팩트겠지만, 이 상황이 문제가 된 것은 태호로부터 발생한 것인지, 캘리로부터 발생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캘리가 과도하게 예민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할 수도 있고, 알베르게 같은 특수한 장소에서 자극에 과도하게 반응한 태호가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서술은 문제를 초래한 사고방식이 아닐까? 두 사람이 존재하고, 한 사람은 액션을 취했고, 다른 사람은 상대방의 액션에 반응하는 액션을 보였다-이런 서술이 언제나 팩트가 아니다. 이런 서술로는 캘리가 느낀 불편함(심하면 고통)과 태호의 욕망의 목마름(부족에 대한 아쉬움)을 해소할 수 없다. 바로 “사고방식”이 초래한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사고방식의 변화없이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3.
사아군까지 9km를 걸었다. 아이들이 천천히 걸어서 3시간 걸렸다. 아이들은 10km쯤은 쉬지 않고 걸을 수 있다. 걷기능력의 향상이고 배낭에 대해서도 적응이 됐다.
사아군부터 레온까지 60km인데, 길이 매우 황량하고 23km 구간에 아무런 숙소와 식당이 없다고 캘리가 알려줬다. 많은 순례꾼들이 사아군에서 열차로 레온으로 점프한다고 하면서 자신도 오후 2시 차를 타겠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기차 타고 싶다고 노래를 한다. 결국 고민 끝에 여러 사정을 감안해서 열차로 레온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같은 시간에 오는 반대편 열차가 있다는 걸 몰랐다. 예정된 2시에 들어오는 열차를 우리 열차로 알고 탔더니 반대 방향인 바르셀로나를 가는 열차였다. 한 정거장 가서 내렸다. Palencia다. 카스티야 지역의 3대 거점 도시 중 하나다(레온, 부르고스와 더불어) 부르고스는 공장밀집 지역이지만 팔렌시아는 농업중심도시 느낌이다. 중심상권이 무너져 보기에 안타까웠다. 레온 가는 완행열차를 타고 어두워지기 직전에 레온에 도착했다.
4.
레온 차이나상회에 가면 한국 라면을 살 수 있다는 인터넷 정보를 얻었다. 30분을 걸어서 찾아갔다. 아이들은 한국 마트처럼 다양한 라면이 있는 모습에 환호했다. 캔김치가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한국 소주도 있지만 참기로 했다. 왕복 한 시간을 걸어 한국 라면(오늘 밤은 육개장면 선택/라면 많이 사왔다. 두고두고 끓여먹으려고)을 산 것이 마음 뿌듯하다. 아이들이 햄이나 치즈를 거부한다. 차이나상회에 가는 길에 시하 아디다스 바지를 샀다. 바지가 너무 얇아서 추위를 견디지 못한다. 그만큼 기온이 내려갔다.
5.
레온의 중심지는 화려하다. 사람도 북적인다. 부르고스하고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인구도 많고 넓다. 벌써 쇼윈도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고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