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토르가

스페인카미노데산티아고 열아홉째날

by 박달나무

#스페인카미노데산티아고


#열아홉째날(2019.11.8)


1.


이례적으로 추운 날이다. 몸이 움츠러드니까 늦잠을 잔다. 출발이 가장 늦었다. 8시40분. 아이들은 처음으로 장갑을 꼈다. 아침을 먹지 못한 채(먹을 곳이 없어서) 10km를 걸어가니 언덕을 지나 갑자기 나타난 가건물이 있다. 여러 음식이 좌판에 어지럽게 있다. 일단 주인장과 인사를 나눴다. 우리 모습을 보더니 곧바로 “안녕하세요. 앉으세요” 한국말을 한다. 얼굴이 가수이자 배우인 신성우를 닮았다. 이 추위에 조리 슬리퍼를 신고 있다. 자유롭게 먹으라고 말한다. 따뜻한 커피도 있다고 안내한다. 우리를 이어 바로 도착한 한국인 청년이 “도네이션 카페인가 보네요”라고 하니, (도네이션 단어를 알아 듣고) 절대 도네이션 아니다, 선물이다, 까미노에 대한 사랑이다, 영어로 힘주어 말한다. 공짜로 주는 선물이니 맘껏 먹으라는 거다. 좌판 앞에 작은 돈통이 있었다. 다비드 이름의 주인장은 황량한 언덕에서 텐트생활을 하는 듯 보인다. 작은 난로에 물도 끓이고 설거지도 본인이 하고 활력이 넘친다. 말과 몸짓에 진정성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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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은 말그대로 맘껏 먹기 시작했다. 한국 청년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 자리를 뜨면서 “너무 많이 먹지 마라. 다음 사람도 먹어야 하지 않겠니?” 가볍게 충고한다. 배고픈 나도 비스킷 여러 개, 레몬 잔뜩 들어간 채소스프, 커피, 호두 등을 먹었다. 시하가 골든키위를 2개 먹으니까 1개만 먹고 멈췄던 태호가 하소연을 한다. “제발 키위 한 개 더 먹을 게요” 먹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결국 먹으라고 했고, 먹는다고 누가 눈치 주는 일은 아니지만 먹겠다는 동기가 ‘시하는 2개 먹었으니’에 있어서 잠시 망설였던 것이다. 그냥 먹어도 되는데, 다 먹고 길을 떠나려니까 시하는 2개 먹은 게 생각났던 것이다.


배고픈 참에 우리 셋이 다양하게 아주 잘 먹었다. 돈통에 5유로를 넣고, 가지고 있던 라면 중 삼양라면(브랜드 이름)세 개를 다비드에게 선물로 줬다. 살짝 당황하는 눈치더니 고맙다고 인사하며 받는다. 그때 예상할 수 있었다. 라면은 다시 다른 이에게 선물로 전달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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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반 일리치가 하버드 특강 때 젠더문제에 대해 언급하자 한 청강생(여성)이 질문한다.


“선생님,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인간의 몸을 본 적이 있나요?”


일리치는 그 질문이 매우 인상 깊었다고 썼고, 나도 살면서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인간’으로 표현하는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아주 특별한 예외를 빼고, 모두 여자이거나 남자로서 태어난다. 선택할 수가 없다. 세상은 이미 신체적 성별에 따른 삶의 패턴이 정해져 있다. 이또한 선택하지 못하고 정해진 루트를 따라 간다.


지금까지 그랬다. 하지만 지금부터 다른 지점에 서있다. 나와 우리 아이들이. 구슬은 그동안 홈 파인 경로에서만 움직였지만 갑자기 무한대의 평평한 쟁반에 올려진 느낌이다. 구슬은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동시에 어디로 가야할지 판단하기 어려워 움직이지 못한다. 우리가 평평한 쟁반 위 구슬과 같다.


국적도 마찬가지다. 다비드가 스페인을 선택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한국을 선택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국적이란 성별과 달리 인위적이고 정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라고 개인의 입장에서 성별과 다르지 않다.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시민이 된 이후 이제 성별이나 국적 조차 개인을 구속하지 못하는, 즉 자유의지가 미치지 않는 분야가 사라진 세상과 만난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자유의지가 작동하지 않는 분야가 있으니 바로 미디어다.


삶이 언어에 묶이고, 이미지에 묶이고, 문자에 묶이고, 노래에 묶인다. 앞으로 아주 오랜 시간 미디어에 묶인 채 살아갈 것이다. 결국 미디어의 영향을 받지만 경로는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이 앞에 있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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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제 오늘 까미노는 옥수수밭과 함께 한다. 가까이 가서 보니 아직 수확을 하지 않아 옥수수가 들어있다. 껍질을 까보니 황옥수수로 사료용 옥수수다. 아이들은 가져다가 쪄먹자고 하지만 찔 수도 없고 찐다고 해도 먹지 못할 거다.


옥수수는 라틴아메리카의 상징이다. 인디언들은 태양의 선물이라고 했다. 15~6세기 스페인이 라틴아메리카를 점령하면서 옥수수가 유럽으로 전파되고,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지금은 밀 다음으로 많은 재배면적을 차지한다. 옥수수로 육식용가축을 키운다.


옥수수 도입으로 유럽 하층민의 식단은 옥수수로 변했다. 인디언의 지혜를 몰랐던 유럽인은 옥수수 위주의 식사로 필수 아미노산 니아신(니코틴산)부족현상인 펠라그라 병에 걸린다. 유럽의 팰라그라는 20세기에 들어서며 사라지지만 21세기에 아프리카에서 다시 나타난다.


세계적 권위의 김순권 박사가 아프리카 기아 퇴치를 위해 옥수수 재배 노하우를 전수하면서 주식이 옥수수로 바뀐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피부병과 신경증이 발생하는 팰라그라 병이 번진 것. 이제는 팰라그라 병의 원인과 치료법도 알고 있는데 아프리카에서 팰라그라를 막지 못하는 건 발병이 옥수수에 있지 않다는 걸 말해준다.


문제는 토지소유의 집중에 있다. 토지소유의 집중은 농업노동자의 삶을 파탄나게 하고, 식단의 부실을 알면서도 막지 못해서 팰라그라 병에 시달린다. 그렇다면 팰라그라의 책임을 옥수수에게 물을 수 있겠는가. 세상일이 모두 옥수수의 억울함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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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열심히 걸어 아스토르가(Astorga)까지 왔다. 꽤 큰 마을이다. 로마 지배의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아스토르가의 다른 이름은 astvrica avgvsta 이다. 라틴어가 아닌가 싶다. 발음 조차 잘 모르겠다. 마을 입구에 철제 레터링 구조물이 있길래 사진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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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거의 대부분 순례꾼들이 아스토르가 공립 알베르게에 모였다. 나는 피곤해서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었는데, 아이들은 마을을 돌아다니거나, 특히 태호는 한국인과 세계인이 함께 파티를 즐기는 지하 식당에서 오래도록 있었다. 태호에게 나중에 전해들었다. 삼겹살이나 각종 음식을 얻어먹었다고 말한다. 어른들이 보면 얼마나 기특하고 귀여웠겠는가. 좋은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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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이들은 20km 걷기를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 쉴 때 배낭도 내리지 않는다. 아이들의 적응력은 뛰어나다. 사실 어른아이 모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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