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벨로스

스페인까미노데산티아고 스물네번째날

by 박달나무

#스페인까미노데산티아고


#스물네번째날(2019.11.13)


1.


아침 8시에 걷기 시작하려고 밖에 나왔더니 길이 젖어있다. 스페인은 신기하게도 밤에 비가 오고 아침이 되면 개는 경우가 많다. 작년 봄에도 거의 그랬다. 서쪽으로 갈수록 분명한 날씨의 특징이다. 이제 곧 카스티야 지방을 지나 마지막 갈리시아 지방에 들어간다.


하늘에 뜬 둥근 천체가 해인지 달인지 잠시 헷갈렸다. 서쪽 땅 아래로 내려가기 직전의 보름달이었다. 사진으로는 다르게 보이지만 맨눈으로는 태양처럼 보였다. 어차피 강렬한 붉은 달빛은 태양빛의 반사인 걸....

IMG_7026.JPEG

2.


아이들이 갑자기 제안했다. 까르푸에 다시 가보고 싶다고 한다. 왜? 가지고 싶은 게 있는데 눈으로라도 담아오고 싶어요.... 그 말에 말릴 수가 없었다. 까르푸는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다. 길이 매우 단순하다. 지도를 보여주고 잘 찾아가고 잘 돌아오라고 말했다. 나는 여기서 짐 지키며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아이들은 5유로를 받아들고 씩씩하게 사라졌다. (5유로는 군것질값)


묵었던 알베르게가 함께 운영하는 bar가 문을 열길래 들어가서 기다렸다. 밀린 일기도 쓰고 커피도 마시니까 행복하다. 아이들은 약속한 11시를 지나 11시40분에 돌아왔다. 5유로를 그대로 가져왔다. 만족한단다. 그럼 됐지.


bar에서 핫초코 한 잔씩 마시고 출발한다.

IMG_7030.JPEG

2.


까르푸에 간 아이들을 기다리는데 등 뒤에서 한 청년이 휙 지나간다. 내가 반대편을 바라보고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 청년이 다가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지나간 뒤에 보니 그의 배낭은 태극기로 망토를 걸치고 있는 거다. 너무나 선명하고 반듯하게 붙들어 맸다.


작년 올해 통틀어 두 달 동안 태극기 또는 자국기를 배낭에 붙이고 걷는 순례꾼을 본 적이 없다. 최근 배낭에 붙은 태극기를 두 번 목격한다.


번거로운 설명대신 일본인이 일장기를 배낭에 붙이고 걷는다고 생각해보자. 미국인이, 중국인이 성조기와 오성홍기를 붙이고 걷는다고 상상하면 어떤가. 배낭의 주인이 국기를 통해 발신하고 싶은 강렬한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한국 청년은 무엇을 발신하고 싶은 것일까. 그건 애국심의 발로인가. 알 수 없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상상이 든다. 국경으로 구별되는 피플의 얼굴이 아니라 국기라는 기호로 사람들의 면면을 대신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한다. 나는 한국 청년들에게 전체주의가 부활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것이다.

IMG_7028.JPEG

3.


또 나왔다. 이태리 여행 타령.


이번엔 터키 아이스크림이 발단이다. 태호가 나비축제를 꺼냈고, 시하가 반딧불이축제 때 먹은 터키 아이스크림 돈두르마 레시피를 읊었고, 내가 시하의 다양한 상식에 혀를 내둘렀다. 태호가 다시 케밥을 거론하면서 터키가 어디냐고 물었고, 그리스 옆에 있다고 하니 터키에서 유명한 게 무엇이냐고 재차 물었다.


터키는 관광산업이 발달했고 한국과도 각별한 관계라고 말했다. 터키에 가면 어디가 유명하냐고 물어 카파도키아와 파묵칼레를 소개했다. 카파도키아 안에 호텔도 있다고 하니 꼭 가고 싶다고 아이들이 입을 모은다. 얘기는 터키와 한국의 관계, 우리말과 어순이 같은 터키어, 아시아 국가인 터키는 사실상 유럽의 일부라고 지리적 상식을 거론하는 걸로 확대됐다.


결정타는 카파도키아와 파묵칼레 사진을 구글에서 찾아 보여준 거다. 아이들은 흥분했다. 가자! 터키로~ 이런 분위기가 되더니, 이태리-그리스-터키를 묶어서 여행을 하자는 거다. 호주에 있지 말고 스페인 이후 유럽여행, 그것도 이태리-그리스-터키를 한달 반 가량 여행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럼 적어도 한달은 여행해야지” 하고 말해서 나온 제안이다) 터키 얘기 도중에 화제가 폼페이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갔다가 최근 베네치아 홍수로 갔다가 관광산업 외에 특별한 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그리스 얘기로 왔다갔다 했다. 그래서 남부 유럽 3국이 아이들의 여행지로 묶인 것.


여행경비를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우리집 잘 살아요. 울 엄마아빠가 여행비 줄 거예요”


그건 아니라고 정색을 하고 말했다. 니들이 커서 일해서 번 돈으로 여행하라고 했다. 아이들이 수긍한다. 좀 놀라웠다. 무조건 떼쓰지 않는다.

IMG_7040.JPEG

4.


한참을 걷는데 천막 수준의 가건물이 나오고, 할아버지 한분이 커다란 개와 함께 앉아있는 거다. “올라”하며 인사를 했더니 들어왔다 가라는 거다. 아이들은 30미터쯤 뒤에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혼자 걷는다고 생각했다. 와인 한 잔 마시고 가라고 하길래 살짝 눈치를 보다가 고맙다고 인사하고 화이트와인 한 잔 받았다. 할아버지 외로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뒤이어 우리 아이들이 “올라” 인사하며 들어오니까 할아버지 눈빛이 달라진다. 벌떡 일어나며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가족이냐고. 복잡한 설명을 피하려고 패밀리야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스맛폰에서 사진을 꺼내 보여준다. 자기 아들이라고.... 한국의 경제신문에 아들 사진과 함께 소개 기사가 있다. 할아버지 아들이 세계적인 담배 에이전시 jti의 한국지사장이란다. 며느리는 한국인이고 9살 손자도 있고 서울에서 살고 있다고. 그러면서 우리 아이들 볼에 뽀뽀를 하고 먹을 것도 준다. 손자 사진도 꺼내서 보여준다. 피붙이에 대한 그리움이 확실히 전해진다. 충분히 이해가 되더라.


우리 아이들을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가더니 종이에 한글로 쓴 손글씨를 보여준다. 자기 아들 며느리 손자가 서울에 살고 있다고 씌여있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우리 아이들 기념사진도 찍었다. 지나가는 소리로 서울에 가서 아드님에게 사진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파파고 번역기 의존) 고맙다며 좋아하신다.

IMG_7041.JPEG

할아버지 천막에서 나와서 걷는데 시하가 말문을 먼저 열었다.


“사장이면 돈이 많겠죠. 아들 회사에 찾아갑시다”(지사장이라니까 그냥 사장으로 입력된 거다)


“어? 사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가서 사진을 보여주면서 우리의 요구사항을 말해보죠 “


“어? 사실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당신 아버지 사진을 보여주었으니 우리에게 돈을 내놓으시오-하자구요”


태호도 맞장구를 친다.


“뭐?! 돈을? 그 생각이 아닌데.... 왜 돈을 달라고 하는 거지?”


“그야 이태리 그리스 터키 여행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잖아요”


“푸하하하~ 역시 시하야. 대단해. 단단한 대O리!”


사실 속으로 많이 뜨끔했다.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jti코리아에 일자리 하나 달라고 해볼까, 내가 잘 하는 일이 있다고 하면서.... 이런 생각을 재미로 했었다. 상상이야 뭘 못하겠어 했는데, 시하가 한 수 위다. 상상이니까 더 과감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jti 코리아 많이 들은 이름이다. 뉴스에 자주 등장한 덕이다.


좌우간 아이들 덕분에 많이 웃었다.


5.


간식으로 핫초코를 시켜먹는데, 아이들끼리 즉흥극을 하는게 연기력이 제법이다. 그래서 제안했다.


“선생님이 진지하게 제안하는 거야. 혼자 하는 연극을 부르는 말이 있어. 뭔지 알아?”


“마임이잖아요”(시하)


“그건 대사 없는 연극이야. 혼자 하는 연극을 모노드라마라고 해. 그런데 너희 둘만 출연하는 연극을 해도 훌륭한 공연이 되겠어. 연기력이 아주 뛰어나. 둘 다 말이야”


“아! 월급이 얼마인가요?”(태호)


“유료공연을 해도 성공할 거야. 전국 순회공연을 하자. 그럼 일년에 수백 만원을 벌 수 있을 거야”


“그럼 당연히 해야죠. 그걸로 이태리-그리스-터키 여행해야지”(태호)


“저는 사양하겠어요. 제가 유치원 때 심청전 심봉사 역을 했어요. 잘한다는 칭찬을 받아서 기분은 좋았지만 연습하는 게 아주 힘들었어요. 다시 하고 싶지 않아요”(시하)


“공연을 하려면 성인 프로 배우들이 두 달을 빡세게 연습한다. 연습이 힘들지 당연히. 그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 아주 센세이션한 연극이 될 거야”


공연합의는 못했고 5월에 춘천마임축제에 데려가기로 약속만 했다. 마임을 배우고 싶다나.....

IMG_7039.JPEG

6.


고추장 오삼불고기는 한국인 순례꾼에게 얻은 것이다. 햇반에 고추장을 가지고 다닌다. 연세가 좀 있는 분들이다. 무거워서 햇반을 어찌 가지고 다니시냐 물으니 자신들은 짐을 대절한 차에 싣고 다닌다고 한다. 그런 프로그램 상품이 있다고. 음..... 왜 한국인이 많은지 알았다. 단체관광상품으로 판매하는구나. 아이들은 너무 맛있다며 함박웃음을 짓는다.(차량은 짐만 싣고 따라 다닌다)

IMG_7045.JPE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