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까미노데산티아고 스물다섯번째날
#스물다섯번째날(2019.11.14)
1.
비가 문제다. 중학교 사회 시간에 배운 지중해성 기후가 이런 거구나 체험한다. 여름보다 겨울에 강수량이 많다더니.... 여긴 지중해보다는 대서양에 가까운데, 위도가 높아도(43도) 크게 춥지 않고 겨울 강수가 많다. 날씨 앱은 앞으로 일주일 계속 비 소식이다.
비가 와도 바람이 없으니 걸을만하다. 다만 우비와 신발이 적절해야한다. 돈 아낀다고 방수트레킹화를 준비하지 않았더니 낭패를 본다. 작년 봄에는 비 때문에 곤란한 일이 없어서 이번에도 걱정을 안 했더니만 겨울 까미노는 가장 중요한 게 신발이란 걸 알았다.
오히려 겨울비를 즐기며 걸을 수도 있겠다. 판초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면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다만 바람이 심하면 다 무용지물이다.
2.
카카벨로스에서 비야프란카까지 걸었다. 고작 2시간40분만 걷고 비야프란카에서 멈춘다. 정식 명칭은 비야프란카델비에르소. 부르고스 이전의 비야프란카몬테스데오카(Villafranca Montes de Oca)에서 묵은 적이 있기에 비야프란카 이름이 낯설지 않다. 아마도 비야+프란카 조합의 이름이지 싶다.
판초를 쓰고 쉬지 않고 걷다가 만난 첫 쉼터로 비야프란카델비에르소 마을 bar에 들어갔다. 처음으로 시하와 태호가 따로 걸었다. 시하는 빠르게 걸어서 태호와 간격을 유지했다. 태호도 굳이 시하를 따라잡으려 하지 않고 묵묵히 걷는다.
그동안 늘 둘이 끊임없는 수다를 떨면서 걸었는데, 혼자서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절대 알 수 없다는 게 인간의 한계이자 매력이다. 전기감전사고 이후 여자들 속마음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멜 깁슨이 겪는 에피소드를 소재로 한 영화가 있었다. 기억에 여자 감독 작품인데, 성별을 떠나서 남의 생각을 알 수 있다면 인류는 애시당초 멸종했을 것이다. 알 수 없으니 알 수 있다고 광고하는 이들이 모든 시대에 존재했다. 무당이기도, 절대권력자이기도, 스토리텔러이기도 했고 지금은 심리상담가 간판을 달고 있다. (심리상담가가 독심술사라는 건 아니다. 누군가 시비걸까봐 미연 방지!)
나 또한 마치 독심술을 하는 듯 치장을 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흘러 생각해보니 실수가 많았다. 반성하고 사과할 일이다.
멜 깁슨의 <What Women Want>도 여성 독심술 때문에 주인공 남자는 파멸한다. 영화가 로코라 부드러운 파멸이고 결국 사랑을 찾는다는 결말이지만 “난 네 생각을 알고 있지”식의 구성은 호러 장르일 수밖에 없다. 그런 세월을 산 탓에 최근 연속으로 악몽을 꾸다가 괴로워하며 깨는가보다.
3.
바르에 들어가서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시하가 혼자 걸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았다. 언젠가 내가 말하길 비야프란카에 가면 한국인이 운영하는 알베르게에서 비빔밥을 먹을 수 있다고 말했나 보더라. 나는 비야프란카라고 했는지 기억에 없다. 다만 한국인이 운영하는 오리온 알베르게가 있는데, 거기서 10유로에 한국식 고추장 비빔밥을 판다고 말했던 건 사실이다. 작년에 내가 오리온 알베르게에서 묵었고 비빔밥을 먹었다. 아직 오리온 알베르게를 만나지 못했으니 언젠가는 나올 것이고, 이제 갈리시아 지방으로 넘어가려고 하니 곧 오리온 알베르게가 나올 거란 얘기를 여러 차례 했다. “오리온 언제 나와요?” 질문을 여러 번 받아서 대답도 여러 번 했던 것. ‘곧’이 비야프란카에 오리온 알베르게가 있다고 와전되고, 시하는 비빔밥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에 빠르게 걸었던 것.
그러니 비극은 시작됐다. 말 그대로 가슴 저린 드라마의 ‘공연’이다. That’s 메소드~!! 작년 페북을 뒤져서 우리가 벌써 오리온 알베르게를 지나온 걸 확인했다. 오리온 알베르게는 카스트로헤리츠에 있었던 것. 우리가 카스트로헤리츠에서 묵었는데 오리온 알베르게를 몰랐던 건 택시로 카스트로헤리츠 공립알베르게로 곧바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고 시하가 더이상 걸을 컨디션이 아니라고 해서 택시를 불러 카스트로헤리츠로 점프했기 때문에 오리온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 상황을 설명하니까 시하는 절망에 빠졌다(빠진 것으로 보였다). 까르푸에서 장을 보면서, 장 본 음식 다 먹을 때까지 매식 없다고 선언했지만, 밖에는 비가 오고 남의 바르에서 음식 꺼내 먹을 수도 없는 터.... 더구나 엎드려 절망감을 표현하는 시하에게 과자와 우유로 끼니를 때우자고 하기에 미안한 마음도 있어서 음식을 주문했다. 핫초코는 이미 한 잔씩 마신 뒤였다.
리조또 식감이 한국쌀 씹는 느낌이고, 토마토 스파게티도 한국에서 먹는 맛이지만 시하는 엎드린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 눈치만 보던 태호가 거든다. "다시 브로콜리로 가는 건 어때요...." 부르고스를 늘 브로콜리라고 부르는 태호는 카스트로헤리츠가 부르고스 근처라는 건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 300km는 될 텐데.... 시간과 비용 모두 불가능해. 이렇게 대답하니 엎드린 채 시하가 레온에서 고추장 팔았잖아요 한다. 고추장이 없어서 한국식 비빔밥을 만들 수 없다고 말하니 대안을 제시한 거다. 이쯤되니 슬그머니 부아가 치민다. “어쩌라고~”
4.
비는 굵게 내리고 시하가 엎드려 있으니 바르에 오래 머물렀다. 바르 벽에 사진이 액자에 넣어져 장식됐다. 처음에 점토 인형을 찍은 것으로 봤다. 사람 두 배 키의 거대한 인형의 얼굴임을 알았다. 축제에 사용하는 인형이다. 더 알아보니 500년 전통의 스페인 9월 축제로서 중세시대를 재현하는 큰 행사라고 한다. 매년 9월 첫 토요일에 열린다고.... 축제 참가자는 중세 복장의 코스프레를 해야만 한단다. 축제 이름은 <Feira Franca>
5.
시하가 몸을 일으키더니 “그만 갑시다” 하면서 배낭을 멘다.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려내린다. 이거 엄청 웃긴 상황인데 차마 웃을 수 없다. 거의 인권침해 사건으로 비화될 수 있으니까.
“저녁으로 맛있는 걸 먹는다면 어느 정도 회복되지 말입니다”
지가 유시하지 유시진 대위야 뭐야.... 송중기 말투라니! 사실 뿜을 뻔 했는데 시하가 얼마나 무안하겠는가. 참았다. 아직도 시하 눈에 눈물이 걸려있다. 눈꺼풀을 닫으면 10밀리리터는 뚝 떨어질 거다.
“알았다. 비록 돈은 다 떨어졌지만 이 마을에서 묵고 저녁은 정식 레스토랑에서~”
그런데 문을 연 알베르게가 없다. 이 마을은 카스티야 왕국 시절 철옹성도 남아 있고, 규모가 꽤 큰 마을이다. 알베르게도 대 여섯 군데인데 모두 문을 닫았다. 아이들을 지붕 있는 정류장에서 기다리라고 하고, 빠르게 움직이려고 판초 없이 뛰어다니며 알베르게를 알아봤다. 없다. 유일하게 문을 연 알베르게는 마을 초입에 있었다. 700미터는 되돌아가야 한다. 비는 계속 내리고.... 그래서 까미노 처음으로 오스탈(hostal; 호스텔)에 들어갔다. 비싼 만큼 시설이 좋다. 침대에 앉아보니 라텍스 매트다.
“여기는 라텍스를 쓰네. 그때 말했던 라텍스 매트야. 누우면 편안함을 느낄 수 있지”
둘이 신나서 매트에서 펄쩍펄쩍 뛴다. 그럴 수도 있지. 내버려뒀다. 오스탈에 우리만 있다. 뜨거운 물에 발을 씻으니 살만하다.
“선생님, 오스탈에 들어와서 비빔밥 아쉬움이 상쇄됐어요. 고맙습니다”
말이나 못하면.... ㅋㅋㅋ 컨펌까지!
“아시죠. 약속했지 말입니다. 저녁은 레스토랑 스테이크입니다”
이로써 마지막 남은 50유로 지폐까지 탈탈 털었다.
6.
얘네가 징그러운 나이가 아니고 이제 초4라서 항상 귀엽다. 잠깐 내 아들이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절대 이만큼 친절하지 않았을 거다. 그게 문제다. 내 아들딸을 남의 집 아들딸처럼 대해야 한다(뒤늦은 깨달음) 자존심 상하지 않게 눈치도 보고, 혈육 아닌 듯 냉정하기도 하고.... 그게 올바른 부모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나도 내 아이들에게 냉정하지 못했다. 손주들에게는 다르게 할 생각이다. “손주가 생길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