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바델로

스페인까미노데산티아고 스물여섯번째날

by 박달나무


#스페인까미노데산티아고


#스물여섯번째날(2019.11.15)


1.


이제 비는 운명이다. 산티아고까지 비와 함께 걸어야할 듯. Bar에서 만난 한국인 대학원생도 시하와 같은 브랜드 고어텍스 방수 트레킹화를 신었지만 발이 다 젖었다고 했다. 망사운동화를 신은 내 발보다 시하 발이 더 젖었다. 그렇다면 ‘아○더’ 브랜드 제품은 욕을 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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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가 마을을 7km 남기고 트라바델로 마을에서 묵는다. 충분히 베가에 갈 수 있고, 베가에 다양한 알베르게가 있지만 내일 오후 태호 아빠를 베가에서 만나서 자야하기 때문에 11km만 걷고 트라바델로에서 알베르게에 들었다.


트라바델로는 매우 작은 마을이지만 까미노 순례길이 지나가기 때문에 여러 알베르게와 바르가 있다. 겨울이라 알베르게 한곳만 문을 열었다. 관리자가 수사 필이 나는데 매우 친절하다. 나무와 숯을 때는 난로가 특이하다. 화덕과 보일러 역할을 함께 한다. 저녁이 되니 비가 눈으로 바뀌고 기온이 0도로 내려간다. 해발이 600미터로 비교적 높은 지대라 그렇다. 나무를 때서 라디에이터에 더운 물을 보내니 그나마 견딜만 하다.


알베르게에서 100미터 떨어진 바르는 문 바깥 칠판에 한글로 또박또박 “라면을 잘 끓여요. 밥과 김치도 드려요”하고 써있지만 영업하지 않는다. 두번 째 찾아갔더니 내일 오전 10시부터 영업한다고 말한다. 아이들 실망이 크다. 덕분에 폼페라다 까르푸에서 장 본 걸 오늘에야 다 먹었다. 내일부터 비닐 봉지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달걀과 컵라면 부피가 커서 배낭에 넣을 수 없기에 며칠째 들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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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걷는 도중에 페레헤(Perexe) 마을의 유일한 바르에 들어갔다. 비도 피하고 몸도 녹일 겸 핫초코 한 잔씩 마셨다. 여기는 순례꾼이 아니면 이용할 사람이 없다고 봐야한다. 민가가 4~5채 정도. 이미 여섯 명 정도가 테이블을 둘러 앉아 시끌벅적하다. 모두 20대로 보인다. 한국인 청년도 한 명 끼여있다. 나머지는 유럽인으로 보인다. 이 친구들이 독주를 스트레이트로 여러 잔 마셔서 흥이 오를대로 올랐다. 게임에 진 젊은 여성이 바지를 내리는 벌칙을 수행해서 순간 당황했다. 등산복 팬츠 안에 레깅스를 입고 있었다. 함께 노래를 제창하기도 해서 바르 분위기가 아슬아슬했다.


태호가 구경하다가 분위기에 덩달아 흥분한다. 내가 살짝 인상을 쓰니까 태호도 현재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 것이다. 검지와 중지로 V자를 만들어 자신의 눈을 찌르는 시늉과 상대방 눈을 찌를 듯한 동작을 번갈아한다. 어디서 본 건 있다. 태호는 애교지만(평소에 나에게 하듯이) 제3자가 보기에 명백한 도발이다.


깜짝 놀라서 행동을 그만두게 하고 낯선 사람에게 그런 행동을 하면 매우 위험한 일을 당할 수 있다고 얘기했다. 태호에게는 좋은 경험이다. 험한 세상이지만 태호로서는 알지 못한다. 술 취해 흥분한 외국인 청년들이 앞에 있으니 내 잔소리가 효과적으로 태호에게 각인되었을 거다.


특히 중학생들에게 장난이라고 생각한 행동이 엄청난 폭력 피해를 당할 수 있다고 조심시켰다. 동네에서 형 아우 서열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무서운 걸 모른다. 어쩌겠나. 이런 것도 가르쳐야 한다. 현실은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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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하가 콩알탄을 아냐고 내게 물었다. 물론 알고 있지. 콩알탄을 문구점에서 파냐고 다시 묻는다. 파는 걸로 알고 있어. 콩알탄을 복도에 뿌리고 지나가던 아이들이 모르고 밟도록 해서 깜짝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얘기가 시작됐다.


“그건 매우 위험하고 비난 받을 일이야.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내가 경험한 일인데 바지 주머니에 콩알탄을 잔뜩 가지고 있다가 주머니 안에서 터져서 화상을 크게 입은 아이도 있었다. 학교와 선생님 입장에서 콩알탄은 절대 금지야. 그보다 더 나쁜 일도 있다”


“더 나쁜 일이요? 사람이 죽었나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아기를 뱃속에 품은 엄마를 뭐라고 부르는지 알고 있니?”


“임산부?”


“임산부는 임신과 출산을 같이 부르는 말이고 아기가 엄마 뱃속에 있으면 임신부라고 하지. 임신한 엄마가 콩알탄 소리에 놀라서 유산한 경우가 있어. 아기가 뱃속에서 죽은 거지”


“엄마가 놀라는데 왜 아기가 죽어요?”


“아이들이 길 가는 임신부에게 콩알탄을 던져서 여러 개가 터졌고, 전혀 예상 못한 임신부는 크게 놀랐어. 아이들도 임신부인 줄은 몰랐지. 뱃속 아이와 엄마는 한몸이야. 엄마가 놀라면 뱃속 아기는 더 크게 놀라는 법이야. 아기는 나쁜 자극에 자기를 지킬 힘이 없어. 크게 깜짝 놀라거나 엄마의 심한 영양실조나 엄마가 극도로 불안하면 아기가 견디지 못하고 죽는 일이 생길 수 있어. 그럴 때 ‘유산됐다’고 말하는 거야”


“그래서 전철에 분홍색 임신부석이 있는 거잖아요. 임신부를 보호하려고”(시하)


“그래. 임신부는 특별히 보호해야 해. 임신부가 힘든 일이나 불안한 일이 있으면 아기에게 나쁜 영향이 가니까”


“어떤 나쁜 영향이요?”(태호)


“임신부 엄마가 불안하면 태어난 아기도 불안감이 클 수 있지. 불안하다는 건 걱정이 많고 친구를 쉽게 사귀지 못하고 마음이 위축돼서 자꾸 숨기만 하려고 할 수 있어. 결국 자기가 불행하다고만 생각한다는 거지.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임신부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쉴 수 있게 해줘야 해. 마음만 먹으면 법으로 임신부를 보호할 수 있어”


“우리 엄마도 날 임신했을 때 힘든 일이 있었을까요?”(태호)


예상치 못한 반응에 순간 얼음이 된 느낌이었다. 그럴리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엄마는 운동도 만능이고 용감한 분이며 직장에서 인정받는 분이라서 그렇다고 부연설명했다.


“우리 엄마가 나쁜 짓 하는 사람을 빗자루로 마구 때려서 쫓아버린 적도 있대요”


“그럼. 얼마나 씩씩하고 용감한 분인데!”


태호의 반응은 전에는 예상할 수(기대할 수) 없는 반응이다. 이점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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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존경하는 선배 교사 김인규 선생님은 랑시에르의 표현을 가져와서 해석하기를 “현실에서 멀어져야 사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남녀 청소년이 성차별에 대한 토론을 할 경우 남자 여자 편을 갈라 싸울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토론자는 남자 또는 여자의 성적 프레임(정체성)을 가지지만 토론이 가능하려면 자신의 성별을 넘어선 포지션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이다. 자신의 성별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는다면 사유한다고 할 수 없다.


태호의 경우는 거꾸로다. 궁극적으론 랑시에르나 김인규 선생님의 지적이 태호에게도 적용되지만 일단은 거꾸로 단계를 거친다. 즉 현실이 자신과 한몸이 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과거의 태호는 임신부의 불안에 대해 들었을 때 자신과 연결시키지 못했다. 임신부는 내 엄마, 뱃속 아기는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위해서 필요한 브릿지를 머리에서 만들 수 없었다. 하지만 임신부와 태아의 관련은 즉흥적으로 튀어나온 화제인데, 귀기울여 듣고 스토리텔링이 ‘나’의 상황으로 연결됐단 점은 태호의 성장변화를 말한다. 또한 태호 앞에 주어진 미션이 무엇인지 명확해졌다. 유의미한 사유로 들어가기 위해서 태호가 임신부의 불안이 태아에 미치는 영향을 자신과 분리하는 단계로 점프해야 한다. 선생이 묘사하는 그림이 자신의 문제와 분리돼야 비로소 사유다운 사유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아직 태호는 관념적 사유를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최소한 상황을 자신과 대응하도록(자신의 문제로 바꿔서 생각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과거보다 성장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태호가 잘 크고 있다는 증거를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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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알베르게 주방에서 만난 청년 커플과 짧게 말하면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남녀커플이 함께 까미노를 걷는 한국 청년이 말하길, “한국에서 걷는다면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갈 겁니다”


제주 올레 경우 게스트하우스가 일인당 2만원이다. 스페인 알베르게보다 두 배 비싸다. 밥값도 스페인 까미노가 저렴하다.


그렇다면 스페인 까미노 걷기를 교육 프로그램으로 개발할 수 있겠다. 그러기 위해서 걷기 멘토를 훈련양성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멘토 희망자를 데리고 직접 까미노를 걸으면서 매일 학습세미나를 열고 싶다.


한국인 걷기 단체팀들은 매일 저녁 푸짐한 식사를 준비하고 와인과 소주로 파티를 하기도 한다. 매일 밤 짧은 파티의 즐거움으로 35일 정도 까미노를 걸어 산티아고까지 가는 프로그램이다.


나와 함께 걷는 멘토 희망자에게 스페인 시골을 걸으면서 건져올릴 공부거리가 무궁무진하며 즉흥적인 주제가 결국 하나의 망(네트)에 걸리는 경험이 와인보다 소주보다 더 즐겁다는 걸 확인하고 싶다. 물론 우리도 와인과 소주 뿐 아니라 스페인의 다양한 지역 맥주도 올릴 것이다. 우리의 즐거움을 어린이청소년에게 전하는 전략을 함께 고민하며 까미노를 걸으면 어떨까 생각하는 것만으로 기분좋았다. 확실히 직업병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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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오늘도 무지개를 만났다. 7가지 색을 모두 확인할 수 있는 무지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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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라디에이터에 널어 바싹 마른 양말을 신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행복하기 쉬운데 왜 이렇게 사는 건 어려운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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