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카미노데산티아고 스물일곱번째날
#스물일곱번째날(2019.11.16)
1.
태호 아빠가 도착했다. 이틀이면 서울에서 스페인의 오지에 닿을 수 있으니 신기한 일이다. 이틀을 하루로 줄이겠다고 천문학적 비용을 쓰려고 한다. 이틀도 신기한 일인데 하루로 줄이는 건 특정 집단의 욕심일 뿐이다.
2.
반가운 마음에 환영 세레머니가 있었다. 음주와 함께. 마침 토요일 밤이고 마을의 행사가 있더라. 레스토랑에서 무료 삼겹살구이를 제공한다. 마을 전체가 모였다. 약 100명 정도. 여기 사람들은 군밤이 일상의 간식이다. 군밤도 얻어먹었다.
3.
트라바델로의 숙소를 나와서 라면을 파는 바르에 먼저 갔다. 10시에 문을 여는 바르에 가기 위해 일부러 가장 늦게 숙소에서 나왔다. 엘리가 운영하는 바르의 매출 중 라면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는 거다. 한국인 순례꾼은 한글로 쓴 라면 광고 칠판을 보고 그냥 지나가지 못한단다.
내게 칠판 광고 문구를 다시 써달라고 부탁한다.살짝 고민하다가 "라면 먹고 갈래" 이렇게 썼다.
4.
작년 같은 코스를 걸은 날 일기를 찾아봤다. 5월19일에 이곳을 지났다. 잠자리는 다르다. 전두엽 가위는 여전히 필요하다. 하지만 작년 박준규는 참으로 안타깝구나. 지금이 훨씬 낫다.
비야프란카에서 출발해서 페레헤에서 커피를 마시고(아이들은 얼음과자) 라포르떼라를 지나 암바스메스따스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Herrerias 마을에 도착했다. 그랬더니 20km.
일부러 20km를 걸으려고 한 건 아닌데 꾸역꾸역 걷다보니 20km를 걸었다. 여정의 지명은 중요하지 않다. 기록하지 않으면 도저히 기억할 수도 없다.
낮의 태양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양지에 30분 서있는 건 고문이다. 셀카로 찍은 내 얼굴은 슬림해진 만큼 검붉게 익었다. 징징이는 덥다며 10km는 울며 걸었다. 그래도 나자빠지지 않고 끝까지 걸어오니 큰 걱정은 없다. 그동안 다양한 아이를 만났는데, 어떤 아이는 알아서 오겠지 하며 뒤에 남기고 가면 찾지 못할 곳에 숨어서 인솔자를 골탕 먹이기도 했다. 우리 징징이는 그런 타입은 아니다. 일단 목적지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나면 전혀 다른 아이로 변한다. 징징이가 애교쟁이가 된다.
"살구꽃 피는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시인은 잊었지만 구절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한때 한국 근현대시 100편을 줄줄 외웠는데 그중의 하나다. 중2 담임이 국어 담당이었고, 그분은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이 시 100편을 외우게 하는 게 목표였다. 외우게 하는 힘은 대걸레자루에서 나왔다. 그분(유감스럽게도 성함이 떠오르지 않는다)은 항상 매질을 하며 말씀하셨다.
"나중에 나 고마운 줄 알 것이다. 외우는 시 몇 편은 있어야 살아가는 데 유리할 거니까"
그냥 매 맞기 싫어서 리스트에 있는 시를 다 외웠다. 그래서 뭐가 유리한 지는 모르겠지만(한때 잘난 척에 좀 써먹었다) 집중하면 암기가 됐기에 나중에 선생을 하면서 상당한 오해를 했다. 누구나 외우려고 하면 외워지는 줄 알았다. 이건 심각한 오해였다. 아이가 집중할 줄 몰라서 외우지 못한다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텍스트를 외우는 건 매우 복잡한 기재가 작용한다는 걸 공립교사를 그만 두고서야 알았다.
다시 원래 얘기로 돌아와서, 살구꽃은 아니지만 찔레꽃을 보니까 고향 생각이 난다. 수구지심이 인지상정인가.... 고향이라고 말해야 서울 변두리 빈민촌(옛 금호동)이지만 뒷산에 찔레나무가 많았다. 아카시나무도 아주 흔했다. 이곳 스페인에서 한국에서 보는 찔레꽃과 똑같은 찔레꽃도 만나고 아카시꽃도 따먹으니 한국 생각이 많이 난다. 정확히 말하자면 집밥 생각이 간절해지더라. 오늘 만난 동백도 제주 동백과 똑같다.
암바스메스따스의 Casa del pescador 알베르게 겸 식당은 매우 인상적이다. 드물게 쌀밥이 나오는 치킨 데리야끼와 카레 메뉴가 있고, 우리가 먹는 도중 주인 아저씨가 만들었다는 "김치"를 갖다준다. 헤어질 땐 "김치포레버"를 외친다. 같이 김치포레버를 외치며 맞장구 쳐줬다. 비싼 음식값에 난 시키지 않았더니 송 선생도 차마 먹지 못하더라. 많이 미안했다. 언제나 돈은 문제아다. 아이들은 허겁지겁 먹더니 송 선생 음식까지 다 먹고는 만족한 웃음을 남긴다.
늦은 시간이라면 함께 운영하는 알베르게에서 머물어도 좋겠단 생각이었다.
오늘 걷는 카미노와 나란히 발까르세 강이 흘렀다. 비 오는 날 한번 없는데 중류에 해당하는 이곳 지형의 발까르세 강물은 매우 풍부하더라. 강 따라 나란히 걷다보니 일본 나가노의 카미코치 지역 아즈사 강이 떠올랐다. 아즈사 강은 해발 2천 미터에서 흐르지만 아주 천천히 흐르고 유량은 풍부하다. 바닥의 자갈이 다 보일 정도로 깨끗한 물이다. 일부러 떠마시기도 해봤다. 카미코치 지역의 아즈사 강도 중류에 해당하는데, 강 따라 걷는 10km 정도가 유명한 관광자원이다. 스페인 서부를 지나는 발까르세 강 중류도 아즈사 강과 유사하지만 관광자원으로 개발되지 않았다. 아무도 그런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걸으면서 아즈사 강이 떠오르고, 일본/나가노/일본의 알프스/관관자원개발/내가 지금 있는 스페인의 발까르세 강/기타 내가 경험한 여행지역 등이 마치 맵핑하듯이 연결되며 가지를 친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건 아무 의미 없다. 내가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아무생각 없이, 생각을 덜어내며 걷고 싶었다. 물론 징징이와 무뚝뚝한 청개구리 때문에 고요한 정서를 이어갈 수는 없지만 왜 쓸데 없는 생각의 용솟음은 지멋대로인가. 생각이 너무 많다. 가지 자르듯 생각을 자르는 가위가 있을 수 없나.
고백하건데 아직도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많이 순화됐지만 아직도 자꾸 나를 특별한 위치에 놓으려고 한다. 그로 인해 상처 많이 받았는데도.... 나도 힘들다.
전두엽 가위가 있다면 자르고 싶다. 싹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