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카미노데산티아고 스물여덟번째날
#스물여덟번째날(2019.11.17)
1.
아침에 길을 나서려는데 오스탈 주인이 기존 까미노는 폭설로 위험하니 우회포장도로로 가야한다고 말한다. 우리 전체 일정에서 가장 힘겨운 날이다. 해발 1700 고갯길을 넘어야한다. 이미 해발 600미터 지역에 있는 것이라 고도로 약 1000미터를 오른다. 우리가 출발하는 곳은 비가 왔지만 산에는 눈이 많이 쌓인 것. 오다그치다 반복하는 비를 맞으며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올랐다. La Laguna 마을은 레온 지방의 마지막 마을이다. 유일한 식당에 각국 사람들이 가득이다. 일군의 이태리 순례꾼들이 기타 치고 노래부르는데 절창이다.
화덕에 즉석에서 구운 돼지갈비를 내주는 메뉴를 먹더니 아이들 기분이 최고조로 오르고, 나머지 길에 룰루랄라 가볍게 걷는다.
2.
그리고 곧 갈리시아 지방으로 들어섰다. 스페인어로 적힌 지명 간판이 스프레이 페인트로 일부 지워지고 갈리시아 말로 고쳐진 게 많다. 갈리시아에서는 J 대신 X를 쓰는 경우가 많다. 19세기까지 갈리시아 왕국이 천 년 이어졌었다. 갈리시아 지방의 학교는 갈리시아 말로 수업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점점 갈리시아 말은 사라져가고 있단다. 현재 갈리시아도 독립하겠다는 목소리가 있지만 카탈루냐나 빌바오 보다는 적극적이지 않다. 갈리시아 첫 마을 오세브레이로의 알베르게에 들었다.
3.
일요일이라 눈 쌓인 오세브레이로 마을은 곳곳이 썰매장이다. 가족 단위로 상당한 사람들이 북적인다. 차량이 뒤엉켜 오도가도 못하는 장면도 있었다. 하지만 바람은 거칠지만 몹시 추운 기온이 아니라 곤죽이 된 쌓인 눈은 거리를 개울로 만들었다. 우리 일행은 괴로운 환경이다. 샤워 후 알베르게에서 마을 중심부에 있는 식당에 나가는 게 곤란해서 저녁식사를 포기했다. 늦은 점심에 고기를 든든히 먹어서 그다지 아쉽지 않다.
4.
태호는 아빠와 함께 걷는 길이 즐겁다. 나에게 쏟아내던 질문을 아빠에게 한다. 아빠도 스페인에서 아들과 함께 있다는 상황이 감격스러운 듯 하다. 당연히 모든 질문에 성의를 가지고 응대한다. 아름다운 장면이다.
태호는 오전 9시 반부터 오후1시까지 알사탕(추파춥스) 하나를 입에 물고 있었다. 10시부터 여러 차례 아빠가 부드럽게 주문했다.
“사탕을 먹을 수 있지만 입에 사탕이 계속 들어있으면 좋지 않은 일이 있을 수 있어. 그러니 빨리 씹어먹으면 좋겠다. 앞으로 100년 가까이 튼튼하게 이빨을 써야하는데, 입에 사탕을 계속 물고 있으면 이가 빨리 망가질 거야”
“내 이는 튼튼해요”
나도 사탕을 입에서 빼야한다고 거들었지만 태호는 꿈쩍도 않는다. 결국 입 안에서 모두 녹아서 없어진 다음에나 사탕막대를 버렸다.
이 장면은 곧바로 학교교실로 옮아갔다. 교사가 지시했지만 지시에 전혀 따르지 않는 학생이 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교사는 지시에 따르지 않는 학생이 자신에게 도전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면 교사와 학생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 재차 삼차 지시했지만 역시 따르지 않을 경우 학생보다는 교사의 흥분지수가 천정을 때릴 수 있다. 열 받고 뚜껑이 열리는 거다. 결국 어떡하든 학생이 지시에 따르도록 강제하는 과정에서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사탕을 당장 입에서 없애라-명령을 내리고, 따르지 않을 경우 아이 입에 있는 사탕 막대를 잡아서 강제로 빼낼 수 있다. 그러면 아이는 강하게 반발하고 이후 과정(수업이나 걷기 등 미션수행 상황)을 보이콧할 명분이 자신에게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 다음을 교사나 부모는 콘트롤 할 수 없다. 어린이청소년들은 그런 과정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상황이 파탄나면(교실이 난장판이 되면) 주도권을 자신이 쥘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어린 친구들을 컨트롤하는 방법이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실수와 실패를 통해 얻은 결과다.
과거에는 자신이 칼자루를 잡는 길이 어른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었지만, 세상이 변하면서 아이들의 전략도 변했다. 지시와 반대로 행동하는 것이 칼자루를 쥐는 길이 되었다. 왜 그럴까. 이 어리둥절한 상황에 대해 아무리 고민해봐도 해명이 되지 않는다. 아이의 행동을 고민해봐야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제 ‘지시’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 아니, 아이들이 왜 그러지-하는 질문은 적절하지 않다. 도대체 ‘지시’에 어떤 문제가 있길래 아이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가-질문을 바꿔야 한다.
5.
어제 전두엽가위로 생각을 잘라내고 싶다고 말했는데, 걷기는 생각을 비우는 게 아니라 온갖 생각이 용솟음치게 한다. 나로서는 그렇다.
가을에 이파리를 떨구는 나무들은 모두 겨울채비에 들었다. 바닥에 다양한 낙엽들이 풀칠을 한 듯 겹겹이 붙어있다. 비가 와서 젖었기 때문이다.
잎은 태양광을 가능한 많이 받아서 광합성을 하는 것이 제 기능일텐데 나무마다 저렇게 다양한 모양을 가지고 있을까 궁금하다는 생각이 올라왔다. 약간의 모양 변화는 있을 수 있는데, 다양해도 너무 다양한 나뭇잎이다.
동원할 수 있는 최대치를 끌어모아 고민하고 추론해보지만 결국 포기했다. 나로선 모르겠다. 중요한 건 나무마다 잎 모양이 다르고, 같은 나무에서 피어난 이파리라도 같은 녀석은 단 하나도 없다는 거다. 다 다르다. 다르지 않다면 세상이 만들어지기도 않았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요소는 다 다르다. 사람만 그걸 모르는 것 같다.
6.
무선이어폰이 편리하다. 걸으면서 가요를 듣는 일이 종종 있다. 복면가왕에서 손승연이 부른 임재범의 <사랑> 노래를 100번은 들었을 것이다. 아주 슬픈 가사더라. 내가 혼자 정해놓은 3대 슬픈 노래 중 하나를 들어내고 <사랑>을 리스트에 담아야겠더라. 들으면서도 늘 딴 생각을 하니까 가사에 집중한 적이 없었지만 이번에 꼭꼭 씹어 음미했다.
시라고 본다면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다. 너무 평범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그렸는데, 반복해서 들으니까 죽음에 의한 이별 상황으로 보인다. 멜로디와 가수의 능력 때문에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찡하지만 오히려 집중해서 들으니 노래가 평범해졌다. 가요는 열심히 들으면 가치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줄 가사가 탁월하다. “그 사랑 바보 같지 않아. 결코 바보 같지 않아” 바로 이 가사. 사실 바보 같은 사랑을 했지만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이별을 앞에두고 “바보 같지 않아” 선언하듯이 내뱉으니까 슬픔의 절정을 보는 느낌이다.
아전인수격으로 내 스스로에게 말했다. “결코 바보같지 않아” 늘 바보라는 생각에 시달려 애절한 이별 노래 가사로 위로한다. 나를.
바보 아니야.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