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까미노데산티아고 서른세번째날
#서른세번째날(2019.11.22)
#멜리데(Melide)
1.
아~ 비.... 종일 비를 맞고 걸었다. 잠깐 푸른 하늘도 있었지만 말이다. 판초를 써도 바지는 다 젖는다. 신발도 푹 젖었다. 신기한 건 숙소에 도착한 바지는 다 말랐다는 거다. 비가 와도 공기가 눅눅하지 않다.
신발은 태호아빠의 지극정성으로 다음날 아침 뽀송뽀송하게 변했다. 알베르게 라디에이터에 운동화를 뒤집어 올려놓고 밤새도록 한 시간마다 상태 체크 후 신발 위치와 각도를 조정했다. 덜 마른 운동화와 보송한 느낌의 운동화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전자는 신자마자 의욕을 잃고 벗어버리게 하고, 후자는 저절로 발을 내딛게 한다. 우리는 궂은 날씨에도 씩씩하게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정성은 에너지임이 분명하다.
2.
가끔 걸으면서 폰은 주머니에 넣고 유튜브 영상을 듣기만 한다. 유튜브에 육아 관련 콘텐츠가 넘친다. 대놓고 서울대 교육학과 출신을 강조하는 30대의 젊은 유투버는 하는 말마다 내가 듣기에 “어이상실”이다. 결국 하는 얘기가 내 말 잘 듣고 아이 잘 키워서 SKY 보내야하지 않겠냐-이런 얘기들이다. 그런데 잘 키우는 방법이란 게 내가 보기에 잘못 키우는 지름길이다. 그런데도 구독자가 5만 명이 넘어서 깜짝 놀랐다.
이 자가 아무도 모르는 비기를 가르쳐줄 테니 잘 들으라고 말하며 웃는 소리와 함께 ‘비고츠키’를 입에 담는다. 비고츠키의 ZPD(근접발달영역)와 Scaffolding(비계설정)을 설명하면서, 비고츠키 이론을 자녀교육에 활용하면 서울대 갈 수 있다고 말한다.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슬프다.
혀 꼬부라진 발음이라 아마도 외국에서 공부하지 않았겠는가 생각하게 하는 30대 남자가 진행하는 또 다른 채널에서 ADHD의 뇌를 이해하면 ADHD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ADHD가 분명한 정신과 질환이기 때문에 치료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가, 발달장애의 한 버전으로 이해하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ADHD 아이와 그 아이의 형제의 뇌를 비교하니 ADHD 경우 전두엽의 미발달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하며, 소뇌만은 ‘정상’ 발달을 했기 때문에 ADHD아동들이 운동은 제대로 할 수 있고 좋아하니 운동치료가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어디서 읽은 자료를 전달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모두 가짜뉴스에 가깝다. 유튜버 크리에이터들의 목표가 구독자와 좋아요 숫자를 늘리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결국 돈을 벌고 싶다는 말인데(돈 버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자신이 전달하는 콘텐츠가 어떤 배경에서 탄생했는지 고려하지 않고 자극적인 말을 하거나 거짓말도 괘념치 않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나중에 거짓말인줄 몰랐다고 하면 그만이겠고, 거짓말로 밝혀질 가능성도 거의 없다.
이런 어이없는 주장들의 공통점은 한 사람을 철저하게 고립된 존재로 놓고 분석한다는 것이다. 죽은 이를 사후에 부검하는 것과 같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독방에 가두고 관찰한다고 그 사람의 특성을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뇌 단층촬영을 통해 사람을 알 수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사이보그라고 해야 한다.
무엇보다 썰을 푸는 이들이 실제로 아이들과 함께 지내지 않는다. 극단적인 경우가 일반적인 상식이 된 것은 ADHD를 치료한다는 정신과 의사들이 문진표만 보고 처방전을 내는 것이다. 그것도 부모나 교사가 응답한 문진표이다.
있을 수 없는 처방을 하는 의사가 당당하게 TV에 나와 아이를 달라지게 했노라 말하는 것을 보면서 좌절한다. 수많은 의사 신화를 만드는 드라마, 영화, 친의사집단 입법행위, 언론의 의과대학 및 의사 떠받치기 등이 쌓이면서 비상식을 상식으로 만들었다.
정신과 의사만 그런가. 비상식이 상식으로 굳어진 건 교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부 일선교사들의 신념에 찬 언행은 완벽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교육에 대해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3.
우리 아이들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세상을 뜯어놓는 호기를 가지라 말하고 싶다.
얘들아 삶의 무대를 뜯어버려
4.
멜리데에 도착하고 급하게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일행 모두 배가 많이 고픈 상태다. 나흘 전 만난 나선진 씨가 sns로 <Pulpo>에 가서 문어요리를 먹으라 추천했다. 쉽게 찾아가도록 지도까지 보냈다. 소문은 들었다. 멜리데 들어가면 문어요리를 먹어야 한다고. 가장 유명한 <뿔뽀>를 찾아가라고. 뿔포는 스페인 말로 문어를 뜻한다. 순례꾼과 현지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뿔뽀>는 겨울 문턱과 궂은 날씨로 손님이 많지 않았다. 덕분에 여유있게 음식을 즐길 수 있었다. 태호아빠가 없다면 바게트 빵 한입으로 끝낼 식사가 만찬이 됐다. 우리 경비는 진정 바닥이 났다. 태호아빠는 눈치 보지 말고 넉넉하게 주문하라고 말한다. 시그니처 메뉴인 올리브기름 베이스에 매콤한 양념을 뿌린 "문어숙회"와 더불어 "고추튀김", "감자프라이", 와인, 바게트를 시켰다. 삶은 문어인데 먹으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식감이다. 매우 부드러운 "쫄깃"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모든 음식이 만족스럽다.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