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수아

스페인까미노데산티아고 서른네번째날

by 박달나무

#스페인까미노데산티아고


#서른네번째날(2019.11.23)


1.


산티아고에서 40km 떨어진 아수아에 왔다. 비가 ‘간헐적’이라 고맙다. 아이들의 컨디션이 최고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추정컨데 목표에 거의 왔다는 안도 때문이리라. 아무튼 거의 날듯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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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태호는 아빠와 더욱 밀착해서 다니고, 시하는 자연스럽게 나와 나란히 걸으며 대화를 나눈다. 덕분에 시하의 생각과 바람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다.


시하의 이름 때문에 발렌시아가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시하가 발냄새가 심해요”(실제로 고약) 때문에 ‘발냄새시하가’→’발렌시아가’로 옮겨가는 말장난을 했다.


발렌시아가는 스페인 사람인데, 이태리명품 브랜드를 100년 전에 론칭해서 지금도 옷, 가방, 신발, 모자, 악세사리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명품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프랑스 브랜드였다) 발렌시아가 제품을 입거나 신고 있으면 사람들이 부자로 알고 서비스가 달라진다고도 말했다. 얘기는 이태리 여행으로 이어졌다.


“우리 호주에 돌아가면 남은 삼개월 동안 여행 다니며 살아요”


“음.... 여행도 다니면 좋겠지”


“그럼 우리 이태리도 가고 터키도 가요”


“아직도 이태리 미련을 못 버렸냐? 태즈매니아도 여행 다닐 곳이 많아요”


그러다가 발렌시아가 양복을 한 벌 맞춰 입고 싶다는 소망으로, 나비넥타이에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고 싶은 바람으로 마구 스키핑하며 욕망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한다.


관건은 돈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시하는 자신이 주변 친구들에게 유세프로 불린다면서, 엄마도 인정하는 요리솜씨로 장사를 시작해야겠다고 말했다. 난상토론을 거쳐 나와 시하가 합의한 내용은 팥빙수를 파는 것이다. 팥빙수 마진이 가장 높다고 말해줬다. 전단지를 만들어 단지에 뿌리고, 집에서 시하가 팥빙수를 만들면 시하 친구 몇 명이 배달원으로 일하는 사업 구상을 했다. 시하는 배달원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걸 몹시 부담스러워 했다. 나는 적절히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사장님 시하는 배달원에게 떡볶이를 제공하는 걸로 친구의 고마움에 대해 보상하겠다고 해서, 악덕 사업주라고 비난했다.


막판에 시하가 팥빙수 사업이 곤란하다고 말한다. 집 냉장고 냉동실이 음식으로 꽉 차서 우유를 얼릴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냉동실 음식을 빼내고 공간을 확보하라고 하니, 소중한 할머니 음식들이라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팥빙수 사업은 시작도 전에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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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태호는 오늘 따라 더욱 룰루랄라 분위기다. 나와 떨어져 아빠와 손잡고 걷기에 아빠와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알 수 없지만 뭔가 아빠로부터 응원과 격려가 있었던 것 같다. 아주 기가 살았다.


아빠 곁에 있다가도 다른 날보다 자주 내게 온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 배를 때린다. 내 몸통을 샌드백 삼아 복싱 연습하듯이 펀치를 번갈아 날리는 것. 그동안 계속 하던 태호와 나의 일종의 의사소통이다. 그동안은 아빠 눈치를 보며 샌드백 놀이를 자제했는데, 오늘은 봉인이 풀렸다. 요령이 생긴 태호가 오늘은 복부가 아닌 명치와 옆구리를 노린다. 맞고만 있을 수 없어서 뛰어도망가면 신나게 쫓아온다. 피한다며 몸을 홱 돌리니까 태호가 내 배낭에 맞아서 나뒹구르기도 했다. 이제 때릴 명분이 분명해졌기에 태호로서는 밑지는 일이 아니다. 넘어져서도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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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내가 초4 때 바로 위 형은 고2학생이었다. 다른 형들은 성인이라서 그나마 고등학생 형이 나와 놀아주는 편이었다. 형은 권투글로브를 끼고 나는 맨주먹으로 권투놀이를 했다.(글로브가 한 짝만 있었다) 형은 나에게 실컷 맞아주다가 막판에 소나기 펀치를 날려서 꼭 내가 울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깔깔깔 웃는 거다. 나는 무척 약올라 하면서도 형이 무서워 입속에서만 불만을 웅얼거렸다.


그러다가 날이 바뀌면 형과 나는 또다시 권투놀이를 했다. 형은 귀찮아 하면서도 응해줬다. 패턴은 늘 똑같다. 내가 형을 일방적으로 때리고 막판에 얻어터져서 우는 결과다. 그리고 다음 날 또 이어진다. 이건 무척 짜릿한 놀이였다.


만약에 형의 배려로 내가 때리기만 하다가 끝났다면 놀이는 이어지지 않았을 게다. 마지막은 내가 얻어맞고 지는 결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가 맞아서 지는 결과가 놀이를 지속하는 동력이라는 걸 무의식으로 알고 있었던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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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초등대안학교를 진행하면서 아이들과 권투나 레슬링을 종종했다. 얼마나 힘이 세졌는지 알아보자며 내 배를 주먹으로 힘껏 질러보라고 하면 아이들이 신이 난다. 분위기 전환에 매우 효과적이다. 내가 아이의 주먹 세기에 놀라워 하면서 아프다고 쇼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일부러 반격하기도 했다. 때리는 척도 한다. 그러면 선생이 실제로 때리지 않는 줄 알면서도 절대로 맞지 않으려 한다. 룰에 어긋나는 일이다. 내가 때렸다면 상대방도 날 때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게임의 룰이다.


지금 아이들은 언제나 자기만 때리겠다고 고집이다. 게임의 룰을 알고 룰에 맞춰 행위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격투기 놀이를 자주 해왔다. 태호하고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아빠가 스페인 걷기에 참여하면서 태호가 선생과 격투기놀이에서 눈치를 살폈다. 덕분에 게임의 룰을 지키지 않지만 룰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다는 인식이 분명한 것을 확인했다. 그거면 됐다.


남자 아이들의 주먹을 받아내는 일은 중요하다. 주요한 소통수단임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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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수아(Azúa)에 도착해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저녁을 겸한 식사이기도. 우연히 들어간 레스토랑은 돼지갈비 철판소금구이를 준비하고 있더라. 주문하고 한참을 기다렸다가 먹었다. 그 맛이 기막히다. 가격도 저렴하고. 아이들도 대만족. 마침 레스토랑은 알베르게도 겸하고 있어 같은 건물에 올라와 피곤한 몸을 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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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집집마다 오레오(hórreo)가 있어서 쳐다보게 된다. 조금씩 디자인이 다르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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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오는 갈리시아 지방에만 있다. 오레오 지붕은 주로 구운 기와를 쓴다. 대부분 집은 석판기와를 쓰는데 오레오는 왜 구운기와를 쓸까 궁금하다. 오레오 지붕은 항상 뽀족한 두 개의 뿔이 있다. 순전히 장식용이다. 소수만 빼고 대부분 십자가가 아니다. 십자가 장식이 자연스러울 텐데 그렇지 않다. 한집이 닭장식을 지붕 뿔 대신 올렸다. 오레오는 포르투갈에서 성행하는 구조물이다. 산티아고와 이어지는 포르투갈 길에 바로셀루스 마을이 있다.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넘어가면 바로 나오는 지역인데, 바로셀루스 닭이 유명하다. 동네 곳곳에 수탉 조형물이 많고 관광 기념품도 수탉 인형이 즐비하다. 이곳 오레오의 닭장식도 바로셀루스의 닭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암튼 갈리시아 지방 오레오는 인문지리 성격을 다 담고 있다. 갈리시아를 지날 때 오레오를 유심히 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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