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콤포스텔라

스페인카미노데산티아고 서른여섯번째날

by 박달나무

#스페인카미노데산티아고


#서른여섯번째날(2019.11.25)


1.


왜 산티아고가 별이 빛나고(콤포스텔라) 수많은 순례꾼들이 모여드는 성지인지 인터넷 정보를 읽었지만 대부분 기억에서 지워졌다. 성인 야곱(또는 야고보)의 묘지가 이곳에 있었다는데, 산티아고 지명과 야곱의 이름이 내게는 연결점이 없었다. 태호아빠가 알려주기 전에는. 산티아고에서 세인트(Sant)를 빼면 이아고(iago)가 남으니 ‘야고’가 아니겠냐고 태호아빠가 말했다. “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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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김없이 비가 내리고, 우리는 목표한 산티아고 도착 당일의 상쾌한 기분으로 습기를 이겨냈다. 오늘처럼 20km가 길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까미노에 있는 바르(bar)나 레스토랑이 몽땅 문을 닫는 바람에 정오가 넘어서 첫 끼니를 해결했다. 출발은 7시35분이었고.....


태호아빠가 비를 맞고 걸으면서도 인터넷 정보를 찾아서 가성비 높은 식당을 찾았고, 모두 만족하는 점심을 먹었다. 레스토랑과 바르의 차이는 정식 메뉴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른다. 레스토랑의 정식은 8~15유로 사인데 하우스와인을 언제나 제공하더라(경우에 따라서는 무한 제공)


태호아빠가 합류한 지난 열흘 동안 자주 정식을 먹을 수 있었다. 덕분에 와인 자주 마셨다. 스페인에서 영어는 거의 통하지 않는다. ‘와인’ ‘비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비노’ ‘세르베사’라고 말해야 알더라. 가벼운 낮술은 걷는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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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태호를 아빠가 옆에 붙이고 걸으니 시하는 자연스럽게 나와 짝이 됐다. 이번 기회에 시하가 손톱을 물어뜯기도 한다는 것, 시하의 욕망, 시하의 좌절, 시하의 노래솜씨, 시하의 스키마, 시하의 재기발랄 상상에 대해 알게 됐다. 덕분에 걷는 길이 수월했다. 시하의 수다가 재밌기 때문이다. 두 아이가 나를 먼저 가라고 시키고 긴 시간 끊임없이 깔깔거리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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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산티아고에 잘 도착했다. 산티아고 대성당 잠시 구경하고, 까미노 사무처에서 완주증 받았다. 우리 증명서에는 ‘로그로뇨부터 산티아고까지 프랑세스 까미노623km’와 시작일, 도착일 날짜가 적혔다. 아이들 사기가 아주 높다. 대성당을 배경으로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너희 딸아들에게 까미노 사진을 보여주도록 해라”


선생님이 80까지 악착같이 살 테니 앞으로 25년 안에 결혼하고 아빠도 되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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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산티아고 들어서기 1시간 전에 시하가 왼쪽 넷째 발가락이 아프다고 한다. 절룩거리며 걷는다. 양말을 벗기고 살피니 물집이 생길 조짐이다. 대책이 없다고 말하고, 마지막 고비니까 용감하게 걷자고 했다. 결국 숙소에 들어가서 보니 콩알 만한 물집이 붙어있다.


태호는 아빠의 돌봄이 극진하기에 긴장을 풀고 땅을 걷는 게 아니라 하늘을 나는 듯이 산티아고에 들어간다. 대성당을 뒤로하고 산티아고 기차역 주변의 숙소를 잡으러 돌아다니는데 태호가 갑자기 발이 삐었다며 절뚝거린다. 아빠가 놀라서 신발을 벗기고 만지고 주무르며 상태를 살핀다. 나는 돌아서서 가만히 있었다. 태호를 위한 배려다. 태호로서는 아빠의 서비스를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게 눈을 흘기더니 금방 씩씩하게 걷는다.


“진짜로 아팠다구요”


순간적으로 발목이 아팠다는 걸 믿는다. 600km를 잘 걸은 아이들에게 고맙다. 마지막까지 아이들은 씩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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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시하가 스스로 지은 별명이 ‘돼마’. 돼지와 하마의 조합이다. 태호보다 먹는 양이 두 배다. 돼지 소리 듣기엔 부족하지만 오동통통 스타일 체형이다.


시하 상반신 사진을 찍고 확인하다가 시하 얼굴 살이 없어졌다는 걸 알았다. “아니 얼굴이 V자야!!!”


갸름해지니까 어린이가 아닌 청소년 티가 난다. 반대로 태호는 덩치가 약간 커졌다. 까미노의 부수적 효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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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까미노의 진짜 기대효과는 무엇인가.


마치 위빠사나 명상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몇 번 언급한 존재론적 전회(Ontology Turn)의 실현태로 나타난다.


위빠사나 명상을 하면 내가 아프다는 자각은 버리고, 고통이 내게 온 것을 알고 나를 찾아온 고통을 ‘본다’는 상태에 이른다. 이것은 내가 고통을 본다는 표현보다 고통이 보는 ‘나’를 느낀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거다. 즉 주체가 둘로 나뉜다. 나를 보는 주체로서 고통이 있고, 나를 인식하는 고통을 바라보는 내가 있다. 내가 나를 인식하지 않고 나 외의 주체의 시각을 사후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다.


서구의 근대는 신의 피조물로서 인간이 아닌 우주의 주체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존재라고 내세웠다. 칸트가 강조한 ‘이성’을 탑재한 인간이다. ‘혼자서도 잘해요’의 배경은 이성을 가진 인간의 사고와 판단이 홀로 가능하다는 패러다임의 성격이다.


상대방이 나를 보는 시각을 수용하여 사후적으로 자신을 자각하는 아마존 밀림 원주민의 사고방식을 서구의 인류학에서 존재론의 전회(전환이 아닌 본질로 복귀한 것으로 본 것)로 명명했다. 인식론이 주제였던 철학의 역사를 일거에 바꾼 언어철학의 등장(비트겐슈타인)을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로 이름 지은 것을 차용했다. 인간 존재에 대한 획기적인 ‘재발견’이다.


새로운 발견이 아닌 재발견이기에, 또한 본질에 대한 발굴이기에 인간의 정신 DNA에 남아있다. 첫 발견이 아닌 재발견이라서 자세만 가다듬으면 서구에서 말하는 존재론적 전회가 쉽게 일어난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특히 그렇다.


스페인 까미노를 걷는 효용성은 안전하고 편안한 잠자리와 식당이 연속적으로 있다는 물리적 조건에 있지만 본질적 효과는 부대끼는 사람이 아닌 자연환경의 시각에서 자신을 사후적으로 검증하는 경험에 있다. 내리쬐는 태양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입장에서 (햇빛의 입장에서) 바라본 나를 태양 속에서 발견한다. 숲의 신선함을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숲의 입장에서 발견된 나를 사후적으로 길어올리는 것이다. 옥수수와 밀의 입장에서 포획된 나를 옥수수와 밀을 바라보며 사후적으로 나를 포착한다. 목장의 소와 양을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 안의 가축이 바라보는 나를 소와 양 속에서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다.


위빠사나의 긴 이어짐을 생각하면 서구에서는 전회지만 우리에게는 전통의 복원이라고 생각한다. 스페인 까미노 위에서 긴 시간을 보낸 사람은 자신을 잃어버림으로써 길 위의 자기를 사후적으로 상봉하는 감동을 만난다. 그것이 뭔지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나 또한 걷고 나서 사후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이성으로 무장하고 홀로 우뚝 선 ‘나’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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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우리는 곧바로 마드리드를 거쳐 호주 태즈매니아로 돌아간다. 태즈매니아에서 시즌4를 이어간다. 12월~2월까지 3개월을 재밌게 지내고 일년 동안 여정은 막을 내린다.


산티아고까지 600여 km를 잘 걸었기에 더욱 자신감을 갖고 태즈매니아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아이들은 해외생활의 생소함과 부모와 떨어져 사는 아쉬움이 많이 사라졌다. 다행이고 고맙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내게 무거운 미션이 있었다. 아주 많이 가벼워졌다. 기분 좋은 일이다.

IMG_7591.JPEG 태즈매니아 집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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