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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Aug 01. 2017

슬픔에 대하여

<인사이드 아웃>을 다시 보고

  지난달 애니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지지 아이들과 보고 아내와 딸에게도 권하여 한 번 더 봤습니다.
  누구나 머릿속에 다섯 감정 기쁨(Joy), 슬픔(Sadness), 까칠(Disgust), 소심(Fear), 버럭(Anger)이 함께 살고 있다는 전제가 재밌습니다. 하지만 창발적이고 독특한 설정은 아닙니다. 영화를 보는 순간 누구나 동양적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생각났을 것이고, 심리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프로이트나 융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기존에 있는 아이템을 엮어서 이제껏 본 적 없는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선보인다면 그것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지지 아이들도 보고 나서 재밌었다고 합니다. 가족과 다시 보고 싶냐고 물었더니 대부분이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동안 두 가지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하나는 '까칠', '소심' 번역에 대한 문제제기고, 또 하나는 현재 한국의 어린이 청소년에게 슬픔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disgust는 싫은 감정이 들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흔히 성격이 '까칠하다'는 말과 거리가 있습니다. 불쾌감이 적절한 표현일 겁니다. fear는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니 소심으로 번역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봤습니다. 제가 정작 이곳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두 번째 생각, 어린이 청소년에게 슬픔이 사라졌다는 깨달음입니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문제 해결의 열쇠는 '슬픔'이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섯 감정의 지휘자는 '기쁨'이지만 기쁘다는 감정(喜+樂)은 문제 해결의 결과이고 문제 해결의 시작은 '슬픔'입니다. 슬프다는 감정은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는 자각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딱한 사정을 가진 사람을 목격해서도 마음이 아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외면당해도 마음이 괴로울 것입니다. 이것은 신체적인 아픔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즉 통증은 신경의 문제고 고통은 심리의 문제라는 지적과 같습니다.   슬픔은 통증이 아닌 고통을 느끼는 것이며 반성적인 감정입니다. Joy, Disgust, Fear, Anger는 사안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지만 Sadness는 사안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스스로 들여다보며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어린이 청소년들은 Disgust, Fear, Anger를 Sadness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쾌감을 쏘아대고, 두려워하며, 화를 분출하는 것이 자신이 슬프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거나 오해입니다. 아이들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마치 원천 봉쇄된 것처럼 보입니다. 양육자는 내 아이가 슬픔에 빠지는 것이 죄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언제나 Joy만이 아이를 지배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내 아이에게 슬픔이 보이는 것은 성장의 증거입니다. 슬픔을 용인하지 않는 가정환경에서 아이들이 성장하기는 어렵습니다.

  맛난 것 먹어서 즐겁고 깨끗하게 씻어서 상쾌하고 놀이공원 가서 신나고 원하는 장난감을 얻어서 기쁜 아이들에게 Joy의 활약이 두드러지지만 정작 문제해결력이 필요한 갈등 상황에 부딪혔을 때 Sadness가 원천봉쇄된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Disgust, Fear, Anger만이 남습니다. 불쾌감을 드러내거나 두려움에 떨거나 버럭 화를 뿜는 일만이 가능합니다.
  "헬조선"이라 자조적인 표현이 난무하는 한국 사회의 어린이 청소년 현실은 까칠하고 소심하며 분노의 복합체입니다. 이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생활하는 저로선 매우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입니다. 그런면서도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처럼 "왜 그렇게 다 싫다고 하니?/왜 그렇게 두려워하니?/왜 그렇게 화를 내니?"하면서 꾸중하게 됩니다. 가정과 학교 지역사회에서 모두 대증요법에 빠진 어른들만 있습니다.
  우리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슬퍼하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자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보여준 Sadness의 활약은 현실에서도 유효합니다. 슬퍼하지 않는데 반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슬퍼하지 않는데 재기의 의지를 가질 수 없습니다.(슬퍼하지 않아도 새 출발 할 수 있는 것이 컴퓨터 게임이지요) 슬퍼하지 않는다면 자기를 알 수 없습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슬퍼하지 않으면 타인과 연결고리를 가질 수 없습니다.
  슬픔은 발화(發話) 하지 않으면 고갈됩니다. 발화되지 않은 슬픔은 반드시 우울로 변질하게 됩니다. 우울(Depression)은 슬픔과 다른 성질입니다. 발화가 가능하려면 상대방이 있어야 합니다.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말할 수 있습니다. 어른에게는 글쓰기가 유효하지만 어린이 청소년에게는 대화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들어주는 사람이 멘토입니다. 멘토가 할 수 있는 일은 들어주는 일입니다.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 들어주면 멘토의 역할은 훌륭하게 마무리되는 것이며 발화자 어린이 청소년은 올곧게 성장합니다.


"슬픔에 빠진 아이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5.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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