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번째날

2019.5.2

by 박달나무

#창발성의좋은예

아침에 비가 그쳤다. 당연히 부시워킹에 나섰다. 차를 타고 나가면 수많은 코스가 있지만, 집에서 바로 이어지는 코스도 대단한 길이기에 매일 날씨가 허락한다면 왕복 80분 걷기를 이어나갈 생각이다. 오늘이 세 번째.

어제 많은 비가 왔기 때문에 골이 더욱 깊게 패여 처음 가는 길처럼 느껴진다. 쓰러진 나무에 올라서면 보기 좋은 사진이 나올 것 같아 올라서 보라고 주문하니까 아이들이 거부한다. 뭐 특별히 어려운 일도 아닌데 왜 싫다고 하냐고 물으니, 위험해 보여서 그렇단다. 나무 껍질이 미끄러워 보인다고 하면서. 그래서 둘을 번갈아 번쩍 들어 누운 나무 위에 올려놓고 사진을 찍었다. 아이들이 절절매며 내려오질 못한다.

“그냥 뛰어내려.”

역시 안아서 내렸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올라가 보세요. 얼마나 미끄러운데요.” 한다.

그래 그까이꺼..... 올라가면서 잠깐 생각했다. ‘음, 약간 미끄러지는 쇼를 해야겠군.’ 하지만 진짜로 크게 넘어질 뻔했다. 껍질이 미끄러운 게 아니라 아예 껍질이 벗겨지면서 껍질 위에 선 내가 벌러덩 넘어질 뻔한 것이다. 순간 뛰어내리면서 넘어지는 건 피했지만 아름드리나무의 껍데기가 넓게 벗겨지면서 큰 사고가 난 것처럼 보인다. 아이들은 좋아 죽겠다고 깔깔거린다. 어쨌든 의도한 바가 성공했다. 한번 크게 웃음으로써 1시간 걷는 길이 편안해졌다.

교사의 권위는 예전에 없어졌다. 내가 권위를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아이들은 이미 부모와 교사를 포함해서 어른의 권위 따위는 안중에 없다. 그럼 아이들(사실 어린이부터 30대 중반까지 같은 분위기이다)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상대방이 누구든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건 디지털 문명의 특성이다. 아나로그가 아닌 디지털 자체의 특성이 비선형(Non Linear)이고, 처음과 끝이 정해지지 않은 것이며 다만 위치만 특정할 뿐이다. A위치와 B위치 사이에 선후배가 없고 서열이 없다. 먼저 태어난 사람은 먼저 죽을 확률이 높은 것이지 先生으로 군림할 일은 아니다. 나를 낳았다는 건 부부의 사랑으로 인한 ‘나’와의 우연적 만남이지, 나에게 일방적으로 명령할 정당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아이들은 유투브에서 만나는 오덕(오타쿠를 한국식으로 고쳐부르는 말)의 권위를 인정한다. 내가 좋아하는 오덕은 내 욕망의 투사(投射)다. 다른 한편 ‘돈’에 무릎 꾾는 경우도 있지만 돈의 권위도 갈수록 희미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절대빈곤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먹고 죽을래도 없는 돈”의 분위기는 사라졌다.

이런 신인류를 어찌 가르칠 것인가? 문장 자체에 오류가 있다. 신인류는 가르칠 수 없다. 자신들이 알아서 보고 배운다. 그러니 외부인이 ‘어떻게’를 고민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됐다. 내가 교수법의 제자백가 식 논쟁을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배울만하다고 생각하면 배울 것이고, 배우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놈을 배움으로 이끌어내는 방법은 없다. 그런데 배우지 않으면 재밌는 일도 없다. 그걸 잘 알기 때문에 아이들은 배우려고 든다. 그때 가장 중요한 기반이 편안한 마음가짐이다. 어른 보호자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 바로 편안한 상태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오후에 그제 시작한 <도형으로 수학공부하기>를 이어갔다. 첫 시작부터 아이들이 흥미를 가졌기 때문에 금방 노트북 앞에 앉는다. 그제와 같은 패턴이지만 좀 더 생각해야 하는 문제를 냈다. 둘이 함께 의논해서 해결하라고 했더니 40분 동안 서로 떠들며 무언가를 시도했다. 나는 일부러 다른 공간에 있었다. 정답을 구하면 “심봤다”라고 외치라고 했다.

“심봤다”를 외치기에 정답을 구한 방법을 설명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각도 샘플을 작도한 후 이동시켜서 각 AIF가 110도라는 걸 알아냈다고 말한다. 여기서 깜짝 놀랐다. 40분 동안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생각한 것이 각도 샘플을 만들었다는 것에 많이 놀랐다. 칭찬하면서 하나 덧붙였다.

"이건 과학적 방법을 쓴 거야. 선생님은 수학문제를 냈는데, 과학 실험으로 문제를 해결했으니 뛰어난 어린이 과학자가 틀림없구나."

칭찬에 한껏 고무된 아이들이 수학적 방법의 해결을 설명해주니 집중해서 경청하고 이해하더라.

어떻게 각도 샘플을 작도할 생각을 했을까. 이런 시도는 처음 본 사례다. 아직 작도프로그램의 기능을 10% 정도만 알려준 상태에서 문제해결력을 보여준 아이들이 대단하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학교나 나중에 수능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완전 다르다.

아마도 이런 각도 샘플을 이용한 시도는 질책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학교 시험에 이런 풀이를 써내면 어떤 점수를 받을까. 현재로선 영점 처리다. 이게 선생님이 무지해서 그런 게 아니다. 이걸 영점 처리하지 않으면 선생님은 사유서를 써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의 지식은 지배적 권위를 가진 정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오후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새도록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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