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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Aug 04. 2017

학교는 할 수 없습니다

학교의 여집합에 학교가 있다

  학교가 기대에 못 미치는 사회적 기관이라는 것은 모두 동의하고 있습니다.
  교사의 전문성(자기효능감, 자존감을 포함한) 발로는 기대에 부응하는 학교의 재건(재편)으로 수렴됩니다.
  그러면 핵심은 학교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제대로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가 할 수 없었던 것을 해보는 것에 있지 않을까요.
  잘할 수 있는데 그동안 못했던 것이다-이건 학교의 순기능에 대한 신앙적 믿음이 바탕에 있습니다.   어찌 학교에 순기능이 없겠습니까.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유비됩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순기능을 몰라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건강한 자본주의를 다시 세우겠다는 노력이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처럼 학교의 순기능을 제대로 살리겠다는 의지는 충분히 건강합니다.
  학교가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이런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학교가 아니라면 무엇이 있을까" "자본주의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와 같은 질문입니다. 
  학교가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하지 않은 채 학교의 순기능을 극대화하겠다는 노력은 의미 없습니다. 

학교는 "학교의 여집합"을 끊임없이 탐구해야 합니다. 

  혁신학교의 개념이 대안학교로 명명되는 학교 밖 과정을 일부 수용하겠다는 의지에서 출발했습니다. 
  이는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하나는 학교 밖이 대안학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또 하나는 대안학교가 휘청거리면서 혁신학교도 함께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권력(교육부)의 학교 장악은 거의 이루어졌고, 저들의 자신감은 강고합니다. 이는 전문집단인 교사의 무능이라기보다는 권력이 쳐놓은 프레임이 워낙 강고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학교식(schooling) 프레임에 대한 의심만으로도 금이 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동안 균열을 위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급진적이란 누명을 쓰고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상대방이 극단에 있는 것처럼 보일 때는 내 위치가 반대편 극단에 있는 건데 말이다) 흔히 듣는 말이 "학교가 없어지면 어쨌든 또 다른 형태의 학교가 생기는 거 아닌가요."
  일단 학교가 할 수 없는 것이 학교를 장악하려는 무리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만 추려본다면,
  학교는 독서 불가능입니다. 학교는 시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등교시간과 하교시간이 존재하고 그 사이에서 작동하는 기관입니다. 과목별 시간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고, 정해진 교시가 있습니다. 50분이든 90분이든 블록단위 수업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이를 어기면 교사든 학생이든 불만 통제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생기는 구체적인 모습은 학교에서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학교는 정량적입니다. 일부 정성평가도 있겠지만 학교는 정량평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또한 평가가 교육과정의 필수 단계라고 당연히 받아들입니다. 학교는 인풋과 아웃풋이 반드시 필요하며 일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웃풋 후에 인풋이 올 수 있다는 상상은 원천봉쇄입니다. 이로 인한 구체적 모습은 학교는 언제나 기승전-시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학교는 퇴행을 절대 인정하지 못하는 공간입니다. 증진을 '+'로 퇴행을 '-'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가 좋은 것이고 '-'가 지양해야 하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증진과 퇴행에 절댓값을 씌우면 둘 다 변화라는 공통점이 드러납니다. 학교는 학생의 변화 자체와 변화량을 잘 살피고 원인과 에너지의 출처를 파악해야 합니다. 즉 퇴행도 에너지의 발현입니다. 

  -10이 +10이 되기 위한 여정은 반드시 정수 0을 지나는 것이 아닙니다. 수직선의 프레임에 갇히면 0에서 왼쪽으로 10만큼 갔다가 다시 되돌아서서 출발점 0을 거쳐 +10까지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이 얼마나 지난하고 쓸데없는 낭비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생각과 행동은 1차원 수직선에 갇히지 않습니다. -10에서 부호만 +로 바꿔달면 -10이 +10으로 20칸을 순간 이동합니다. 이로 인한 현실적 모습은 에너지가 큰 아이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적 에너지의 발현은 핵심이라고 동의하면서 마이너스 방향은 그 값이 아무리 커도 0(영)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엉덩이에 뿔난 놈이 무기력한 놈과 같게 취급됩니다. (오히려 선생은 무기력이 고마울지도.....)
  학교에서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을까?
  학교에서 평가를 아예 잘라낼 수 있을까?
  학교에서 마음껏 마이너스 방향으로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을까?
  학교는 할 수 없습니다. (2016.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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