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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Aug 04. 2017

아이들의 싸가지를 위한 변명

아날로그를 구축(驅逐)한 디지털

  얼마 전 문상을 다녀왔습니다.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입니다. 돌아가신 어른은 어머니의 사촌오빠로 외가의 큰 어른입니다. 향년 97세. 따라서 상주도 할아버지입니다. 장례식장엔 온통 호호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계십니다. 문상객 중에 비교적 가까운 어른을 만나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분도 어머니의 사촌오빠. 어머니보다 한 살 많은 90세로 녹내장으로 인해 20년 전에 실명하신 분입니다. 선글라스와 지팡이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오셨어요?" 
  인사치레로 안부와 이동수단을 여쭈었습니다. 두 아들이 노인네를 모시고 온 것입니다.  

  대학에 논술이 도입된 초기에 서울대에서 '늙은 부모를 집에서 모시는 것과 요양원에 모시는 것에 대한 자기 견해를 밝히라'는 문제를 낸 적이 있습니다. 당시 수험생들은 압도적으로 집에서 모시는 것을 지지하는 글을 제출했습니다. 요양원으로 모시지 않고 집에서 봉양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르다는 논거를 배경에 깔고. 이 친구들은 낮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논거의 객관성과 논리력이 약하다는 평가였습니다. 논술시험은 수험생이 얼마나 착한지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명하면서.
  논술은 논술이고, 이제 70 가까운 할아버지가 40년 가까이 경제 능력이 없는 아버지를 봉양한 아들로서 입장은 무엇일까요? 그 세월에 무슨 논거가 있겠습니까. 그저 흔들리면 큰일 날 당위만 있을 것입니다. "부모봉양"이라는!

  지금은 이 당위가 흔들리는 걸 넘어 산산이 깨졌습니다. 현재 10대 아이들은 경제 능력을 상실한 부모를 봉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아이들에게는 기성세대의 당위가 없습니다. "부모봉양 불가" 당위로 바뀌었습니다. 예외는 있습니다. 부모가 경제능력을 잃지 않았다면.

  동전의 앞면만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좀 더 신중하게 현상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애비에미도 없는 싸가지 바가지 아이들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적절하지 않습니다. 부모봉양이 이해할 수 없는 불편함인 아이들의 배경에 디지털 시대의 전환이 있습니다. 디지털 문화의 특성 중 하나가 권위의 해체입니다. 하나의 중심에서 가지처럼 뻗어나가는 아날로그 구조는 뿌리가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심이 따로 없는, 중심이 늘 이동하는 디지털 문화에서 뿌리는 퇴행의 아이콘입니다. 뿌리와 잎은 구분되겠지만 순서는 더 이상 없습니다. 잎이 먼저 생기고 뿌리가 나중에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역할 분담만 있지 구속은 없습니다.

  문제는 낡은 자본주의 문화가 찌꺼기만 남아 디지털 전환을 왜곡한다는데 있습니다. 부자아빠가 아니라면 존경받지 못한다는 현상은 한국에서 매우 광범위합니다. 고쳐야 하고 바꿔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만 개탄한다고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중심이 없고, 중심이 아무 데나 있고, 중심이 비선형적으로 바뀌는 디지털 문화를 이해하며 아이들을 읽어내야 합니다. 북한군이 무서워한다는 식으로 조롱하고 희화화할 일이 아니지요.

  그래서 지금의 아이들의 미래가 어두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의 세계를 열어젖힐 것이고, 어두운 것은 꼰대들의 자기중심적 해석에 있습니다. 더욱 상상력이 강조되는 시점입니다. (2016.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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