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은 성장의 디딤돌_나헤라 (2019.10.23)
1.
20km를 걸었다. 5시간에 걸을 거리를 7시간 반이 걸렸다. 오늘도 오후에 비 소식이 있어서 서둘러 7시15분에 걷기 시작했다. 8km를 걸어서 벤또사에서 브런치를 먹었다. 바르(bar)에서 한 시간 넘게 있었고 걸음도 워낙 느렸다. 비가 오는 바람에 한 시간은 판초를 뒤집어 쓰고 걸었다. 도중에 힘듦을 표현하지 않았지만 나헤라에 도착하고 밥을 먹을 때 많이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하지만 표정은 충분히 견딜만하다고 말한다.
어제와 차이는 걷는 내내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어제 묵은 동네는 큰 도시 로그로뇨에서 가까워 일반적인 일정에 따라 걷는 사람들은 지나치는 곳이다. 숙박 패턴이 달라지니까 사람들과 만날 수 없었던 것. 온통 포도밭 뿐인 시골길을 우리 세 명이 걷다보니 흥미로운 일이 없었던 것이다. 둘이 수다 떠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걷기의 고단함이 더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도 된다. 즐겁자고 스페인에 온 건 아니다. 그렇다고 극기훈련하자고 온 것도 아니다. 우리는 왜 스페인에 왔지? 그보다 왜 까미노에 한국 20대 여성이 가장 많을까 생각한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분석 결과를 서술하기로....
2.
8월에 다시 호주에 올 때 아이들이 전문 트레킹 신발을 가져왔다. 스페인에서 걸으려면 방수 트레킹 신발이 필요하기에 부모에게 요청한 것. 시하는 새 운동화를 구겨신는 일이 많아서 잔소리를 했다.
“신발 구겨신으면 뒷부분이 꺾여서 발뒤꿈치에 부담을 준다. 나중에 스페인 까미노 걸을 때 고생할 거야”
어제부터 시하는 신발 뒷축 꺾인 부분에 닿은 뒤꿈치 살갗이 헐어서 고생한다. 상처에 붙여줄 밴드 테이프도 있고, 시하 아빠가 사준 근육 보강 테이프도 가방에 있지만 시하가 도와달라고 할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시하는 자신이 운동화를 꺾어신었기 때문에 생긴 상처라고 생각하기에 선생님에게 하소연을 못하고 불편하게 어기적거리며 걷는다. 그러다가 피가 나고 딱정이가 앉아서 결국 굳은살로 변하면 뒷꿈치 불편함이 해결될 것이다. 먼저 도움을 구하지 않는데 선생이 나서서 조치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앞으로도 지켜만 보기로.... 천천히 걸어도 되니까.
3.
지난 10월12일에 케냐의 킵초개 선수는 인류 최초로 마라톤 풀코스를 1시간59분에 기록해 서브2 시대를 열었다. 수많은 도우미들이 킵초개의 기록을 위해 동원되고 마라톤 대회가 아닌 기록측정을 위한 이벤트였기에 세계기록으론 인정 받지 못한다. 킵초개의 쾌거를 전해들으면서 킵초개 선수는 장수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내 생각에는 부정적이다. 프로 스포츠 선수들은 몸을 혹사하기 때문에 장수 하기 힘들다. 인간의 몸으로 42km이상을 2시간 이내에 달리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왜 이런 이벤트를 벌이는가.
10년 이상을 사는 고양이가 주인의 보살핌 없이 길고양이가 되면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거친 음식과 위험노출에 따른 스트레스가 수명을 단축한다. 과도한 운동이나 격심한 노동은 인간의 몸에 중대한 스트레스를 준다. 오래 못 산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개념은 양면성이 있고, 양면성 덕분에 외피를 갖추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스트레스 없이 생명의 성장은 없다는 것이 다른 측면이다. 자신을 파고드는 스트레스에 대항하고 넘어서는 의지가 성숙한 인간을 만든다. 수명이 짧은 목숨들은 빨리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반대로 긴 수명을 가진 동물은 어른이 되는 기간이 길다. 인간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스트레스도 갈래가 있다. 좋은 스트레스는 딛고 일어서는 디딤돌이 되고, 나쁜 스트레스는 쓰러지게 만드는 걸림돌이 된다. 가정의 파괴나 학대는 걸림돌이다. 걷거나 등산은 디딤돌이다. 이것조차 정도에 따라 디딤돌과 걸림돌을 오갈 수 있다. 부모나 교사의 가이드와 질책은 당연한 일이지만 일정 수준을 벗어나면 학대가 되는 원리다. 만약 매일 등산을 하고 점점 고산준봉 등정에 집착한다면 걸림돌이 된다. 중독의 문제보다 몸을 혹사하는 일이 생명력을 떨어뜨린다.
4.
스페인 순례길 걷기는 아이들에게 적당한 스트레스를 주려는 의도다. 세계 어디를 걸어도 상관없지만 스페인 순례길처럼 안전하고 먹고 자는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곳은 없다. 걷다가 노숙을 해야한다면 우리 아이들에게는 걸림돌이 될 뿐이다. 힘들지만 묵묵히 오래 걷는 일은 구원이 될 것이다. 이때 현재 스트레스 수준이 디딤돌일지 걸림돌일지 가늠하고 대처하는 일이 가이드(교사)가 할 일의 전부다.
5.
어느덧 한국 사회가 풍요로워서 독이 될 정도가 되었다. 내 아이를 잘 키우는 일이 아이에게 풍요를 선사하는 것이라 믿는 분들이 많다. 거의 대부분 부모의 신념이다. 가장 흔한 예가 읽고 싶다는 책을 말만 하면 사주는 경우다. 장난감, 먹을거리, 치장품 등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욕구를 바로바로 채우면 장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성장하지 못한다. 결핍이야말로 성장의 디딤돌이다.
*서브3를 위해 열심히 달리기 운동하는 것, 복근 만들기 위해 헬스장에 개근하는 일에 반대한다. 목표를 설정하고 목표달성을 위해 자신을 채근하는 것은 짧은 근대가 주입한 이데올로기일 뿐. 운동을 하더라도 깊은 사색이 필요하다. 오염되고 퇴색한 이데올로기 주입 경로가 ‘학교’다. 학교는 지속되겠지만 이제는 천천히 느긋하고 느릿느릿 걷기를 바란다. 뒤도 돌아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