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둘째날

이태리여행을 약속하다_나바레떼 (2019.10.22)

by 박달나무


#로그로뇨에서_나바레떼까지


1.


아이들은 6시에 일어나서 주스와 바나나로 아침 때우고(나는 빵과 도너츠 먹고)이런저런 준비 끝에 정각 7시에 첫발을 뗐다. 자고 일어나 아이들이 해결하기 어려운 게 침낭 개서 커버에 넣는 거다. 여러번 연습하면 할 수 있겠지만 손이 작아서 아직은 무리다. 워낙 침낭 커버가 타이트하다. 크면 다 할 수 있다. 내가 침낭 처리하는 게 맞다. 시작이 절반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드디어 시작... 걸으면서 배움여행 7호 인쇄용 PDF를 확인한다. 어쩔 수 없이 걸으면서 카톡으로 의견보내고, 지시하고.... 하다보니 중년의 현지 여성이 “안녕하세요”(한국 말로)인사한다. 우리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쪽으로 가라고 알려준다. 200미터쯤 손해보고 제대로 길을 찾아 걷고 또 걷고~~ 한참 후에야 동이 튼다. 여명이 사라지고 완전히 밝아지면 9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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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이들 인생에 가장 긴 시간을 걷는 것. 아니다. 태즈매니아에서 9시간을 넘겨 걸은 적이 있구나. 크레이들마운틴 정상에 다녀왔던 지난 5월에.... 6월에도 7시간 산행이 있었다. 그때 힘든 기억 때문에 아이들은 첫발을 떼면서 긴장했다. 한없이 걷는 게 고통을 참는 극기훈련이라고 생각한 거다. 하지만 새벽 공기의 상쾌함과 이른 아침 움직이는 사람들의 격려, 스페인이라는 상상의 먼나라에서 걷는다는 호기심들이 어울려 유쾌하게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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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부러 가르치지 않았는데 “그라시아스” “올라” “부엔 까미노”를 배우고 자주 써먹는다. 이름이 뭐냐고 스페인말로 물어도 눈치로 “태호”라고 대답하며 웃는다. ‘대답’과 ‘미소’가 아이의 변화를 상징한다. 그동안 내게 왔던 어린 친구들은 대답하지 못했고 웃지 않았다. 누군가 관심을 갖고 나이나 이름을 물으면 피하거나 내 등 뒤에 숨곤 했다. 당연히 발화자에게 미소로 응대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제 태호는 그렇게 한다. 태즈매니아 Jo선생에게 그렇게 하더니 이제는 낯선 외국인에게도 미소로 대답한다. 절대 모르는 사람과 사진 찍지 않았지만 이제는 누구라도 사진촬영에 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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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바레떼는 로그로뇨에서 13~4km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우리는 걷기 시작한지 4시간 반만에 도착했다. 중간에 느릿느릿 걸은 곳도 있고, 특히 나바레떼 진입로 양쪽에 펼쳐진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먹느라 30분을 머물렀다. 내가 먼저 마을로 들어오고나서 30분 뒤에 아이들이 만족한 얼굴로 나타났으니 1시간을 포도밭에 있었던 것. 잔소리 듣지 않고 실컷 포도를 먹겠다는 심산으로 나보고 먼저 가라고 했다. 포도는 수확이 이미 끝났지만 이삭이 꽤 실하게 달려있다. 처음 먹어보는 맛인데 아주 좋다. 알갱이는 작지만 한국의 캠벨과 비교가 안 된다. 이곳 리오하 지방이 세계적인 포도산지고 나바레떼는 커다란 와인공장이 있어서 마을이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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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이들이 이구동성이다. “선생님, 스페인이 호주보다 훨씬 좋아요. 여긴 ‘쓰레기’가 아니라 ‘개꿀’이네요.”


다양한 나라에서 왔다는 남녀노소가 우리 아이들을 격려하고 웃어주고, 간혹 먹을 것도 나눠주고.... 그런데 세계 각국 걷는이들 중 한국인이 가장 많다. 실제로!


이태리 청년과 아가씨(따로따로)를 만났고, 멕시코 아줌마와 아저씨 (따로따로)도 만났고, 수많은 스페인 현지인과 인사했고, 27살 대만 청년도 만나고, 한국 청년 여성들을 많이 만났다. 아이들은 우리말이나 한글 낙서에 반가움과 놀라움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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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모두 나바레떼를 떠나 다음 행선지로 갔지만 우리는 나바레떼에서 묵기로 했다. 다음 알베르게(순례자를 위한 숙소)는 10여 km를 더 가야하는데, 첫날이라 이 정도만 걷기로 한 것. 사립 알베르게 한 곳만 있지만 로그로뇨에서 가까워 우리말고 손님이 한 명 더 있을 뿐이다. 우리가 자는 방은 이층침대가 6개 있지만 우리 세 명이 독차지했다. 저녁 식사도 미리 예약을 받아서 제공한다. 마카로니 파스타와 바게트, 양배추, 토마토와 당근 채 썬 샐러드에 치즈를 듬뿍 넣은 접시와 와인이 식탁 위에 준비됐다. 이태리에서 왔다는 아가씨는 알베르게 직원처럼 일했다. 자신은 스키리조트에서 일한다고 하길래 스키 강사냐고 물었더니, 리조트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이란다. 화씨 9/11을 만든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음 침공은 어디>에서 이태리 미싱사가 유급 휴가가 두 달이라고 말하더니 “휴가가 두 달도 안 되면 인간이 어떻게 살겠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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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동갑인 멕시코 아저씨는 씨푸드 도매업을 한다고. 화끈한 라틴 아저씨 때문에 와인 한 병 다 마셨다. 큰 아들이 27살인데 쉐프로 일한다면서 멕시코에 놀러오면 연락하라고 자기 이름 Juan(후안)과 전화번호를 종이에 적어준다.


저녁을 맛있게 먹으며 얘기를 듣던 아이들이 이태리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태호가 이태리 가서 핏자를 먹고 싶다고 하길래 “까짓꺼 못 갈 일이 뭐있냐. 가자! 이태리로~” 아이들은 이미 이태리 청년을 만나서 사진을 같이 찍었고(수염 기르고 눕듯이 키를 맞춰 사진 찍은 청년이 이태리 사람) 그에게 챠오(안녕) 인사말도 배웠다. 나는 와인 덕에 큰소리 친 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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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내일은 오늘보다 두 배 걸을 거야 말하니 화끈하지는 않지만 싫다고도 않고 두루뭉실하게 긍정한다. 아이들보다 내가 먼저 잠들었다. 누군가 방 불도 끄고 침대에서 잘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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