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빨랑 지나서 하루를 끝내고 싶다_보야디야 (2019.10.31)
1.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 200km 길은 메세나 고원지역으로 거의 평지인데다 나무가 없고 끝없는 초원이 펼쳐진다. 여름과 겨울에 너무 덥거나 추워서 순례꾼들은 지루하게 느껴서 기차를 타고 점프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아이들은 어떨까.... 일단 비교할 기준이 없어서 아이들은 특별함을 느낄 수 없다. 지평선을 볼 수 없는 한국의 지리적 특성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초원이 하늘과 닿는 뷰를 신기하게 생각하지 못한다. 지금은 걷기에 딱 알맞은 온도와 기후를 보여서 특별히 힘든 조건도 아니다. 사실 태즈매니아의 초원을 질리도록 보고 살아서 스페인의 메세나 초원은 거칠고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혼자만의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갈망하는 것도 아니다.
두 아이는 그저 빨리 시간이 지나서 숙소에 들어가는 것, 더 시간이 지나서 마드리드에 가서 한식을 먹는 것, 그리고 호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고 있다.
그럼 이 지루한 길을 걷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의미는 언제나 사후적으로 따라온다. ‘의미있다’ 또는 ‘의미없다’를 행위 이전에 관념적으로 가늠한다는 건 착각이다. 한국사회, 특히 한국의 교실은 이런 착각을 증폭시키고 주입한 죄가 있다. 아무도 자기의 죄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이건 왜 하는 거죠? 어떤 의미가 있나요?”
“지금 네가 하는 건 나중에 네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의미가 있어”
주동자와 피동자 사이에 위 대화가 무한반복하며 한국인은 어린 아이에서 성인으로 자란다. 사실은 반대가 맞다. 위 대화를 무한반복할 때 후자의 말을 뱉는 이가 주동자의 지위를 확보하고 전자의 말을 발화하는 자가 피동적인 위치에 선다.
다시 말해 행위 이전에 의미를 찾는 이가 삶을 주도적으로 살 수 없다. 자신이 의미를 이해했을 때만 미션을 수행하겠다는 자세는 매우 소극적이고, 숙제를 회피하고 싶은 심리의 반영이다. 미션은 언제나 내 앞에 있다. 문화라는 사회의 패턴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새로운 삶의 패턴을 자신이 개척할 수 있다는 주장과 가르침은 유감스러운 거짓이다.
아이들 앞에 길이 놓였다. 부모와 선생에 의해 강제로 놓였다. 거꾸로 갈 수도 없다. 벗어날 수도 없다. 일단 종착지로 가야한다. 힘들게 자신의 발로, 어깨에 부담스러운 배낭을 메고 가야한다. 도착하고 나서 의미는 스스로 형성할 수 있다.(구성할 수 있다) 그리고 나서야 자신만의 새로운 패턴을 구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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