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와 지식의 함수관계_까리온 (2019.11.2)
1.
까리온은 비교적 큰 타운이다. 카미노에서 로그로뇨, 부르고스, 레온, 산티아고를 빼면 까리온이 제일 큰 타운이다. 알베르게도 여러 곳이다. 식당도 여럿이고 순례꾼을 위한 물품 가게도 있고 은행도, 버스터미널도 있다. 현지인의 삶도 활발하다. 작년 5월에 일인 5유로 가격의 공립 알베르게 ‘영혼의 집(Espíritu Santo)’에 머물렀다. 아주 마음에 드는.... 영혼의 집 이름이 무색하지 않은 훌륭한 알베르게다. 어제 같진 않아도 오늘도 걷는 도중에 소나기를 만났다. 4시간 만 걷고 까리온에 들어와 알베르게를 찾아 들어가기로 했다. 나는 당연히 영혼의 집으로 향했고, “무척 깔끔한 알베르게인데 좀 엄숙한 분위기지” 무심코 말했다. 그랬더니 시하가 강하게 반대한다. 엄숙한 분위기 싫단다. 마음대로 얘기할 수도 없는 알베르게 가고 싶지 않다고....
다른 알베르게에 들어갔다. 옛 수도원을 알베르게로 사용하는 산타클라라 수도원 알베르게다. 출입문부터 수도원이 주는 중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높고 육중한 문에 거대한 화강암 큐브를 쌓은 건물이 5층 높이 쯤 여겨진다(실제는 2층) 그래서 그런지 알베르게 사용자가 없다. 우리를 맞이하고 등록하는 분은 딱 “나 수사”라고 이마에 써진 분이다. 분위기가 그렇다. 표정이 굳고 도수 높은 안경에 작은 키와 두꺼운 가슴, 정수리에 숱이 없고, 높낮이가 없는 영어를 구사한다.
반전이 있다. 싱글 침대 3개만 놓인 별도의 방을 줬고, 세탁기와 건조기가 완벽하며, 부엌도 편리하다. 화장실과 샤워시설도 평균 이상이다. 우리 말고 프랑스 아저씨 한 분, 국적불명의 여성 한 분만 묵었다. 결론은 알베르게를 아주 잘 선택했다는 것. 우리 아이들 입장에서는 심심할 수 있겠지만, 대신 까리온 다운타운을 속속들이 돌아다니고 슈퍼마켓을 네 번 다녀왔다.
2.
아침에 숙소에서 나와 두 시간이 지났을 즈음 소나기를 만났다. 나는 아이들보다 300미터 쯤 앞에 있었고, 5분 거리 앞에 커다란 성당과 마을이 보여서 비를 맞으며 걸었다. 비야르사르데시르가(마을 이름이 좀 길다)마을 호텔 출입구 캐노피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빗줄기가 점점 굵어진다. 과연 아이들은 자기 판초를 쓰고 올 것인가, 그냥 비를 맞으며 올 것인가 스스로에게 내기를 걸었다. 바람이야 판초를 쓰고 오기를 기대하지만 혼자 판초를 쓰기에 불편함이 있어서 그냥 비를 맞고 올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각자 판초를 쓰고 나타난다. 오~ 서로 판초를 쓰도록 도왔겠구나 감동했는데, 시하 왈, “ 그냥 제가 판초를 꺼내 입었는데요. 하나도 어렵지 않았어요” 한다. 50미터 쯤 뒤에 태호가 나타났다. 판초를 꺼내 입느라 조금 늦은 것. 판초를 입었지만 얼굴은 그대로 노출된 상태다. 왜 모자를 쓰지 않았냐고 하니까 모자를 찾지 못했다고 대답한다. 판초 앞뒤를 거꾸로 입어서 굳이 모자를 쓰면 얼굴 전면을 가리게 된 것. 급한 마음에 뒤집어쓰긴 했는데 시하는 먼저 출발하고, 모자를 쓸 수 없지만 정돈할 새 없이 머리는 비를 맞고 걸어온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잔소리를 할까 하다가 참고 거두었다.
시하에게는 태호 판초 입는 걸 도와주지 그랬냐고 말하려고 했고, 태호에게는 도와달라고 요청하지 않은 건 아쉬운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쉽다고 했는데, 옆 사람 도와주는 행동의 변화보다 도와달라는 요청 하는 게 더욱 어렵고 아쉬운 점이다. 잘난 척 하기 위함이나 스스로 위안을 삼기 위한 친절의 시혜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도와달라는 요청은 쉽지 않다. 도움 요청이 약자 또는 결핍의 상징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흔히 자존심과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시하나 태호 둘 다 도와달라는 말을 못하고 그야말로 똥 마려운 강아지 마냥 나를 쳐다보는 일이 대부분이다. 내 표정을 니가 살펴서 적절하게 아쉬운 부분을 메워 달라는 무언극을 하기 마련이다. 참으로 아쉬운 지점이다. 아이들끼리 도와달라고 요청하면 관용구처럼 뒤따르는 말이 있다. “그럼 넌 내게 뭘 해줄 건데?” 그러니 ‘아니꼽고 더러워서....’ 정서를 아이들에게 전달했다. 누가? 어른들이 그랬다. 대가 없는 친절은 촌스럽거나 바보짓이란 정서가 이미 우리들 사이에 고정됐다. 이건 복잡한 문제라 잔소리로 극복할 수 없어서 그냥 넘어가기로 한 거다. 판초를 입은 것만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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