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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Aug 04. 2017

부모가 카운슬러면 안 되는 이유

카운슬러 부모는 '너' 없는 '나'가 존재한다는 관념을 심어준다

  이번에는 별도의 프롤로그로 출발하겠습니다.


칸이 사랑한 25세 천재 영화감독 자비에 돌란의 다섯 번째 작품이 <마미>입니다. 지금 자비에 돌란은 28살이고 예상한 대로 "마미"는 "엄마"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찾아서 보시길 권합니다)
<마미>는 ADHD가 주제입니다. 
엄마인 디안은 미혼모로서 16살 아들 스티브와 삽니다. 직업은 있지만 넉넉한 살림이 아닙니다.(캐나다가 배경) 스티브는 ADHD 판정을 받은 아이로 청소년 정신과 수용소에 3년 동안 살고 엄마에게 돌아옵니다. <마미>는 여러 가지 영화적 장치(미장센)로 관객인 저를 매료시켰습니다. 그중 하나의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엄마 디안에게 청혼하는 이웃집 홀아비가 있습니다. 홀아비는 변호사이지요. 디안은 스티브의 과잉행동(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불을 지른 일)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손해배상을 청구당하자 홀아비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합니다. 조금은 신경 써서 화장하고 스티브를 데리고 홀아비를 클럽에서 만납니다. 스티브는 그런 엄마를 보며 자기를 버리고 재혼하려는 "수작"이라고 오해합니다. 홀아비가 엄마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것이 불안한 스티브는 무대에 나가 노래를 부릅니다.(클럽에 노래방 기계가 있어서 신청자는 스테이지에 나가 노래를 부를 수 있네요) 그런데 스티브는 음치. 하지만 엄마를 향한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진정성으로 부르는 노래는 들어줄만합니다. 동네 양아치들이 노래 부르는 스티브에게 시비를 겁니다. "음치 새끼 노래를 듣기가 역겹군" "바보 음치는 당장 꺼져" 시비 거는 놈들은 술에 취해서 온갖 비난의 욕을 스티브에게 퍼붓습니다. 스티브는 몇 번 꾹꾹 눌러 참습니다. 그러다가..... 맥주병으로 양아치 한 놈의 머리를 내리칩니다. 장면을 목격하고 경악한 홀아비는 스티브 행동을 비난합니다. 그런 홀아비의 귀싸대기를 한대 갈기는 디안. 그리고 일갈합니다.  
"단세포적 이해력인 너를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 개새끼야!" 


  프로이트 니 융이니 칼 로저스 니 하는 심리학적 이론의 지원으로 반(反) 공동체 행동의 어린이 청소년 또는 마음이 아픈 성인들을 상담하는 전문가와 기관이 많습니다. 점점 많아질 것입니다.

  상담전문가는 오랜 시간 공부하고 훈련받아서 전문가로 성장한 것입니다. 단순히 시험을 통과해서 획득하는 자격증이 아닙니다. 이분들이 활용하는 검사지에 대한 신뢰는 당연합니다. 국내 개발은 거의 없습니다. 해외 석학들이 진정성 있는 실험과 통계 기술을 사용하고 여러 번 검증하여 유효성에 대한 확신이 서는 것만 사용합니다. 
  내담자 중심 기법의 상담은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상담자의 공부 내공과 자기 컨트롤이 분명할 때 내담자의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상담은 결정적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논리에 따른 겁니다. 
  연수입 2천만 원 집에서 태어난 아이와 재벌의 손자로 태어난 아이의 언행을 같은 기준에서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이 사회적 배경과 조건에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서울과 부산의 거리에 대한 개념이 조선시대 사람과 현대 사람이 다른 것처럼 역사문화적 차이를 배제하고 사람의 마음을 그릴 수 없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농아인(聾啞人)을 만났다고 상정해봅시다. 농아인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발음으로 말을 하지 못합니다. 보통 농아인은 "벙어리 장애인"으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말 못 함"의 장애는 "듣지 못함"에서 온 것입니다. 듣지 못하면 말하지 못합니다. 그 역은 참이 아닙니다. 말하지 못한다고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간결한 논리입니다. 말하기는 듣기와 짝을 이루었을 때만 존재합니다. 말하기만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카운슬러는 내담자의 말을 '평가'하지 않지만 '개입'합니다. 그런데 내담자의 말은 동시에 내담자의 듣기와 한 몸입니다. 내담자가 무엇을 들었는지 알기 위해 내담자의 진술(말하기)에 의존할 뿐입니다. 그것은 논리적 모순입니다. 말하기가 듣기를 배제할 수 없는 개념이라서 무엇을 들었는지 말해달라는 요구는 얼마나 웃긴 상황인가요. 우스갯소리 하나로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경상도 사람이 함경도 사람에게 물었다. "이 뭐꼬?" 함경도 사람이 되물었다. "뭐꼬가 무시기?" 경상도 사람은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물었다. "무시기가 뭐꼬?" 그리고  돌아오는 말은 "뭐꼬가 무시기", 그리고 또 "무시기가 뭐꼬" ~

  카운슬러는 클라이언트의 말만 들을 수 있습니다. 즉 클라이언트가 무엇을 들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클라이언트의 듣기 내용을 클라이언트의 진술에 의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클라이언트가 무엇을 들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카운슬러가 클라이언트의 듣기 현장에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 외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카운슬러가 상담소에 클라이언트의 방문을 통해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구조적으로 말하기와 듣기를 분리하게 됩니다. 마치 말하기가 클라이언트의 독자적인 콘텐츠라고 승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건 카운슬러와 클라이언트 양자의 세뇌를 불러옵니다. 결과적으로 말하는 이, 즉 클라이언트의 진술이 클라이언트 자신의 말이라고 믿음으로써 말한 이가 자신의 듣기를 돌아볼 기회를 제거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 결과는 말한 이가 말한 내용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를 강화합니다. 
  클라이언트의 삶의 현장을 떠난 상담소가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은 산업자본주의(모더니즘)가 만든 허상입니다. 제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부모들이 점점 카운슬러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카운슬러와 같은 부모가 바람직한 부모로 보이는 분위기에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카운슬러 부모는 '너' 없는 '나'가 존재한다는 관념을 심어줍니다. 진정한 '나'를 찾으라고, 진정한 '나'를 정립하라고, '너'를 고려하지 말고 올바른 '나'를 완성하라고 개입하면서 말입니다.
  듣기 없는 말하기가 불가능한 것처럼 너 없는 나도 불가능합니다. 말하기를 독립시키고, '나'를 분리시켜서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세상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뉴스라고 쏟아내는 "지금 여기"인 것입니다.

  부모는 내 아이의 카운슬러가 아니라 내 아이 듣기의 원천(소스)이 돼야 합니다. 또한 발화자로서 부모의 역할은 당연히 내 아이의 말을 듣기부터 출발합니다. 말하기와 듣기가 순서가 없는 무한 반복의 동그라미를 이루는 것입니다. 

  반면 카운슬러는 아이의 말하기 내용만을 고려 대상으로 합니다. 그래서 카운슬러의 가장 나쁜 예가 권력자와 이미지가 겹치는 것입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사도 마찬가지이고요. (2016.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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