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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Aug 04. 2017

명사와 동사 사이의 아포리즘

추계대 정원철 교수의 프로젝트 보고회

  

  추계대 정원철 교수의 프로젝트 보고회 주제다. 주제만 보고 확 끌리는 마음이라 폭우가 내리던 지난 토요일(25일)에 전시장 17717에 다녀왔다. 성북동 177-17번지 건물의 지하에 있다고 17717이라 하는가 본데, 소박한 공간이다. 
  2주 후에, 6시간 동안 주어진 주제와 조건에 맞는 창작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story_doing"을 해야 하는 고3 수험생 딸을 위해 마련한 4가지 막판 벼락치기 아이템 중 마지막 이벤트였다. 
  명사와 동사에 대해 고민했던 계기는 박동섭 교수를 매개로 김영민의 화두를 접했기 때문이다. 김영민은 이렇게 말한다.(<봄날은 간다> 274쪽)  

"요소론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의 맥락 속에서 동사라는 메타포가 유용하게 사용되어 이런저런 논의의 생산성을 높인 것은 이미 상식이 되었다."

  내 입장에서 쉽게 이해하자면, 명사를 요소론적 세계관의 메타포로 동사를 요소론적 세계관 비판의 메타포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김영민은 동사도 명사 못지않게 권위적이라고 지적하고 부사로 지향을 말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부(副)사는 겨우 ‘곁 따르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문장에서 결정적인 성분이 아니다. 없어도 되는 이것은, 있음으로써 얻는 소득과 그 보람 속에서 어떤 징후(徵候)를 보인다."

  나로선 다 안다고 할 수 없는 말의 향찬보다 명사와 동사 '사이'를 시각적으로 펼쳐 보인다는 예술가가 있다고 하니 꼭 확인하고 싶었다. 19살 딸에게 제대로 해명할 수 없는 아비는 프로젝트 보고회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아비의 역할을 조금 하는 듯싶었다. 그동안 여럿을 보여주었던 동기가 그런 아비 역할론이었다.

  보고회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①자전거와 그 뒤에 매단 수레를 해체해서 마치 입체를 펼쳐 2차원 전개도로 환원한 듯한 모양으로 바닥에 깔아놓았다. 납작해진 수레 옆에 소위 '노릇노릇키트'도 입을 벌려 속을 다 공개하고 있다. 아참, 프로젝트 이름이 "노릇노릇프로젝트"다. 맛있게 구워진 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 노릇, 부모 노릇, 선생 노릇, 남편 노릇 등을 말한다. 참으로 재미있지 않는가. 노릇노릇키트는 한 칸에 흰콩과 검은콩을 섞어놓고, 옆칸으로 흰콩과 검은콩을 분리해서 놓도록 빈칸이 두 개 마련된 나무상자를 말한다. 정원철은 노릇노릇키트가 치매 어머니를 '어머니만의 집'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②입구에서는 보이지 않는 안쪽 공간에 스크린을 걸고 10분짜리 영상을 무한반복 재생하고 있다. 자전거 앞바퀴가 아스팔트 도로를 계속 굴러가는 모습만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되는 영상 상단에 자막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스크롤된다. 작가는 자막으로 프로젝트의 배경과 의의를 설명하고 있다. 동영상이 내용 없는 배경이 되고 텍스트가 메시지를 가진다는 설정이 아마도 의도적이었으리라. 동영상은 이미지에 시간을 가한 결과물이다. 명사에 시간을 밀어 넣어 동사가 될 수 있는 것과 겹쳐졌다. 텍스트는 본디 시간의 단절이다. 하지만 동영상 속에서 억지로 스크롤되는 신세로 나타난다. 화면 가득 여러 줄에 걸쳐 텍스트를 배열하면 움직이지 않는 책처럼 연출할 수도 있는데 작가가 10여분 동안 한 줄로 흐르는 자막으로 나타낸 건 고민의 결과로 보인다. 정작 시간을 소거하면 소멸되는 동영상은 정지된 스틸 사진과 다를 바 없는 단편적인 그림의 무한반복으로 나타내고, 시간을 고려하지 않는 텍스트는 10여 분을 꼼짝하지 않고 읽지 않으면 안 되게 한 줄 스크롤로 흐르게 한 것은 명사와 동사에 대한 기존 인식에 "어긋냄"이 아닐까 싶었다. 김영민의 표현에 의하면 세상은 어차피 '어긋남'이다. '어긋남'의 세상에 의도적인 '어긋냄'이 예술의 숙명인가.
③작은 전시회장의 벽면에 액자들이 걸려있다. 대충 10개로 보인다. 아포리즘이라고 하더니 짧은 문장들을 붓펜으로 써서 액자에 넣은 것으로 보였다. 자세히 보니 문장을 쓴 여러 장의 한지가 겹쳐져있다. 얇은 한지 덕분에 아래와 아래의 아래에 있는 종이와 글씨가 흐릿하게 보인다. 아포리즘의 축상(築上)이 최상위 아포리즘의 현저를 가능하게 한다. 어찌 하나의 말이 그 자체로 존재할 건가. 말을 낳은 부모와 그 부모를 낳은 할아버지 말이, 그리고 또 계속 거슬러 조상의 말이 있기에 눈과 귀를 통해 내게 들어오는 말이 최종적 결과로 나타난다. 종이 위에 종이를 계속 겹친다는 행위가 시간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결국 아포리즘의 통시성을 시각화한 프로젝트인 것이다. 무릎을 탁 칠만 했다. 맥락을 벗어나 박수근의 <빨래터> 같은 우둘두둘한 질감의 작품이 떠올랐다.

  

  수레를 분해해서 바닥에 놓은 것에 대해 정원철은 부품 하나하나가 명사고 부품 전체를 연결하면 동사가 되는 것이라 설명한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다. 부품 하나하나는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 존재하지만 세상에 기여하지 않는다. 즉 노동하지 않는다/일하지 않는다/그리고 사랑하지 않는다. 명사를 말한다. 전체 부품을 연결하면 수레가 되고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콧바람 쐬게 바깥에 모실 수 있다. 동사다. 
  이창동 감독의 <시>에서 배우 윤정희는 치매 판정을 받는다. 의사는 환자에게 먼저 명사를 잊을 것이고 결국 동사도 잊을 것이라 말한다.(동영상에 흐르는 자막에서 영화 <시>를 언급한다) 명사가 동사의 어머니다. 명사 없이 동사 없고 동사 없이 명사는 의미 없다. 굳이 요소론적 세계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말하지 않아도, 명사와 동사라는 몸 사리게 하는 철학적 언명이 아니라도 "움직이지 말라" "가만히 있으라" "의지를 실천하지 말라" 강요당하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운명은 결국 동사의 삶일진대, 핵심에 시간의 소비가 있다. 


  노릇노릇 프로젝트-재밌다. 명사와 동사 사이의 아포리즘 주제를 이토록 단순하고 극명하게 시각화했다는 점에 감탄한다. 역시 공공미술과 시민 프로젝트 최고 전문가답다. 공감하며 크게 배웠다. (2015.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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