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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Aug 04. 2017

정희진의 어떤 메모

호모사피엔스는 멸종했다

  정희진이 공부 텍스트다.
  어제 자 한겨레의 <정희진의 어떤 메모>는 두 갈래로 내게 들어온다.
  "팩트 전쟁, '포스트 트루스'시대다. 경험은 저절로 팩트가 되는가. 백인 남성의 말은 왜 그토록 권위를 갖는가. 논문은 팩트고 SNS 글은 아닌가. 증언은 자의적이고 문서는 확실한 사료인가. 팩트, 지식, 진실의 차이는 무엇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경험과 지배 이데올로기를 팩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시대. 이것은 사유의 종말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멸종했다."

  위 두 단락이 첫 번 째 공부 텍스트다. 
  '팩트' 단어가 유행어가 되고 팩트 전쟁, 팩트 폭력, 팩트체크, 팩트 픽션 등으로 분화해서 국어가 됐다. 그러나 신조어로서 '팩트'는 정희진의 정리가 옳다. 자기 경험과 지배 이데올로기를 설득력 있게 포장한 것이다. 분식(粉飾)이라는 말이다.
  나는 80년 대 말에 공교육 교사가 됐다. 죽어도 좋다는 학생 때 결기가 교사 이후에도 살아있는 건 좋았지만 4.19 교조 체제 때 선배들의 내용과 닿을 수없어서 무엇이든 맨땅의 헤딩 스타일로 덤비고, 성공/실패를 떠나 하나의 맥락으로서 경험을 조직화했다. 그리고 팩트(정희진이 언급한 의미)라고 믿고 산 세월이 아주 길었다. 
내가 경험한 것은 내 경험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내 안으로 축적하는 일종의 패키징(packaging) 작업이었다. 만약 4.19 교조 활동을 하던 선배들과 연결고리가 있었다면 훨씬 일찍 깨달았을 것이다. 나의 선의는 내가 믿었던 방향성을 정당화하려는 증거조작과 같았다는 것을.(물론 善意였다)

  두 번 째는 다음 문장에 대한 독해다.
"에셔에 대한 일반적인 키워드는 기하학, 초현실주의, 가상 세계, 그래픽 디자인 시조 등인데 모두 작가와 대상의 관계에서 파생된 주제들이다. 에셔가 이 문제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예술가와 작품 사이의 무간(無間)과 자기 경계의 카오스를 형상화했다."
  위 단락은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보다 더 어렵다. 난 한국의 고등학생이라면 위 서술을 이해했으면 좋겠다. 현실은 전혀 아니라는 걸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독해가 저하하는 현상을 어찌할 것인가. 

아주 아주 아주 중요한 우리의 과제가 아닐까. 


  우리라 함은 좁게는 나 자신과 어린이 청소년을 만나는 선생님들과 넓게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일에 종사하는 모든 어른을 말한다. (2017.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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