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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함께 읽기 둘째날

대하소설 광개토태왕 담덕 읽기 모임 후기

by 박달나무

광개토태왕 담덕 2권 천손신화 읽기모임 후기

-철저히 주관적 뇌피셜을 주절거리다

얼마 전 25년 만에 하덕규, 함춘호가 한자리에서 연주하고 노래하는 모습을 KBS에서 볼 수 있었지요.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를 처음 듣던 (거의) 40년 전,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한 구절에 100만 볼트 전기를 맞은 듯 부르르 떨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이번에는 <가시나무>보다 <좋은 나라>(시인과 촌장 3집;1988)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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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그곳에서 만난다면

슬프던 지난 서로의 모습들을

까맣게 잊고 다시 인사할지도 몰라요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그 푸른 강가에서 만난다면

서로 하고프던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냥 마주 보고 좋아서 웃기만 할걸요

그곳 무지개 속 물방울들처럼

행복한 거기로 들어가

아무 눈물 없이 슬픈 헤아림도 없이

그렇게 만날 수 있다면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그 푸른 동산에서 만난다면

슬프던 지난 서로의 모습들을

까맣게 잊고 다시 만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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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젊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대검을 허벅지에 꽂을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등교하는 학생들로 가득한 시내버스에 자동소총을 난사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너무 비참한 장면을 글로 묘사하고 싶지 않아요) 언제나 장마철 하늘 같은 내 속을 달래며 비루한 20대를 절둑절둑 걸어갈 때 시인과 촌장의 <좋은 나라> 가사가 허무하게만 느껴졌었지요. 그저 “하고픈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냥 마주 보고 좋아서 웃는 나라”를 꿈꾸는 것이 죄가 되는 나라에서 수백 수천 만의 땀과 피를 흘리고야 <좋은 나라>를 맘껏 꿈꿀 수 있는 나라가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아직 좋은 나라는 멀리 있지만 말입니다.

<광개토태왕 담덕> 2권 막바지에 천손 담덕이 태어납니다. 3권에서 담덕의 고난의 길이 펼쳐지겠죠. 분명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집념의 37년 삶이었을 겁니다.

우리는 두 번째 읽기 모임을 가졌지요. 여주여행자센터 회의장처럼 편안한 환경은 드뭅니다. 저는 단지 두 번의 방문이지만 여주여행자센터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작가를 직접 모시고 열 번이나 모여서 얘기 나눌 수 있다는 건 축복이 아니겠는지요.

백제와 고구려는 모두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형제국이었지요. 백제가 국력이 열세로 돌아선 성왕 때 부여로 천도하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고친 건 그들이 500년 동안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다는 증거일 겁니다. 현재 주류 사학계도 신라 사람들은 고조선 유민들이 남하해서 세웠다고 하고, 삼국 모두 예맥족의 후예로 인정하고 있어요. 그러니 한반도의 삼국을 서로 다른 나라로 구분할 필요가 없는 거죠. 2000년 전 나라의 개념과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국민국가 개념은 서로 다르다는 걸 고려해야 합니다.

한발 더 나아가 웅크린 호랑이 모양의 한반도와 만주 일부에만 국한해서 우리 민족의 터전을 제한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지도를 들여다보면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는 한반도와 한몸이지요. 육지로도 연결되지만 잠깐만 바다를 건너면 서로 이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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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명당이라는 우리 여주의 영릉에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세종대왕 사후 19년이 지나 이장하여 모실 때 이동 수단은 한강의 선박이겠지요.(정확한 고증 자료는 없습니다) 설마 서울 강남 대모산에서 여주 영릉까지 사람이 들고 걸었겠습니까. 소달구지에 임금과 왕후의 관을 실어 날랐겠습니까. 수많은 고개와 산을 넘어야 하는 육지 여정은 선대 임금과 왕후를 모시기에 불가능해요. 당연히 배를 이용해서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이동했을 겁니다.

오늘날에는 우리 민족이 고조선부터 선박을 이용하여 물류를 나르고 해군 전투도 했다는 걸 잊었어요. 통일신라의 장보고는 청해진에서 베트남 다낭을 오갔다는 기록이 있지요.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바다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분명합니다. 울산에서 동쪽으로 일직선을 그으면 만나는 일본의 시마네 현(여기 놈들이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하면서 자기 현 소속이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이즈모(出雲), 마쓰에(松江) 지역에 제가 가보니 3~4세기에 이미 신라와 교류한 흔적이 많았습니다. 663년 백제 멸망 시기에 대규모 일본 해군을 파병하여 백강구(금강 하구) 전투를 벌인 걸 보면 한반도와 일본의 적극적인 교류는 확실해요.

따라서 황해와 발해만을 선박을 이용하여 왕래한 건 틀림없지요. 발해만을 둘러싼 랴오둥반도의 꼭지점 다롄(大连)에서 산둥반도 꼭지점 옌타이(烟台)까지 날씨가 좋을 땐 어렴풋 보이기도 하는 가까운 거리에 있고, 황해가 수심이 낮고 바다가 거칠지 않기에 고구려나 백제가 중국의 가장 기름진 땅인 화북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한 것은 당연하지요. 더구나 4~5세기에 화북은 5호16국(5호는 한족 입장에서 다섯 오랑캐를 말함;선비/흉노/강/저/갈) 시대라서 백제의 요서경략설(백제가 요서 지역의 일부를 차지하였다는 설)도 무조건 배척할 수 없다고 보여요.

담덕 2권에서 백제가 요서지방 일부와 산동반도 일대를 지배 내지는 적어도 경제권역으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묘사는 합리적이고 타당한 전개가 아닐는지요. 고구려 백제의 해양 이용이나 대륙과 (최소한) 경제적 교류를 부정하는 것은 20세기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입니다. 저는 답답한 마음에 윤명철 교수의 <고구려해양사연구> 책도 샀습니다. 워낙 고구려와 관련한 사료가 없다보니, 고대사 연구에 탁월한 윤명철 교수 책까지 찾게 되네요.

고조선(원래 고조선은 없지요. 단군이 ‘조선’을 세운 것인데, 식민지 사학자들이 옛 고(古)자를 붙여서 고조선이라고 부르게 됐다지요)은 길게 보면 2200년 존속했고, 부여는 900년, 고구려는 700년 왕조였지요. 존재는 확인되지만 사료는 없어진 현실에서 유일한 희망은 진정성 있는 작가의 소설뿐이지요.

입체를 인식하려면 사방에서 봐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뇌)에서 3차원으로 상상해야지만 우리는 입체라는 정보를 유지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2차원 단면만 볼 수 있잖아요. 역사는 시간의 3차원을 인식하는 필수 도구이지요. 지금 이 순간만 인식하는 사람은 피라미드를 보고도 삼각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같아요. 흔히 말하는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를 말하지요. 중국 사료에 의하면 장수왕 때 국호를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꿨다고 하는데, 왕건이 나라를 고려로 이름 지은 것, 이성계가 단군의 조선을 그대로 국호로 삼은 건 일제 식민지 이전 우리 선조는 왕조는 바뀌었어도 민족의 흐름을 하나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먼 옛날 한반도 북쪽에 있었던 미지의 고구려를 읽는 것이 아니라 『광개토태왕 담덕』을 통해 4358년이라는 시간의 입체를 인식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올해 단기력 4358년)

지난 모임에서 핵심 질문은 “불교를 공인한다고 해서 왕권이 강화된다는 주장이 합리적인가”이지요. 왕즉불(王卽佛) 사상 언급이 작품에도 나오거든요. 상상하자면, 대왕 구부(소수림왕) 가라사대, “이제 불교는 우리 고구려의 국교이니라. 이제 부처님을 모시듯 나를 추앙하라. 나는 곧 부처이니라” 한다고 갑자기 백성들이 부처님께 예를 올리듯 임금에게 마음으로 충성을 맹세한다는 게 어색하잖아요.

모임 이후에 저는 골똘히 생각했어요. 불교공인과 왕권강화에 대하여 말이에요. 제 결론이 학술적으로 정확한 건 아니겠지만 이런 기회로 ‘생각’을 해본다는 게 중요하다고 봤어요. 일단 소수림왕 불교공인이 372년이라고 하니, 곧바로 로마 콘스탄티누스 1세의 313년 밀라노 칙령이 떠올랐습니다.(중학생 때 세계사 시험공부한 덕이지요)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 탄압을 멈추겠다는 선언이고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것은 380년이지요. 고구려 불교 공인과 아주 비슷하지 않은가요. 저는 중2 세계사 시간을 통해 고대 유럽 땅에서 일어난 사건과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사건의 유사성이 있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죠.

얘기를 다시 불교공인으로 돌아와서 계속할게요. 불교를 공인한 소수림왕은 담덕의 큰아버지로서 5세기 고구려 최전성기를 여는 발판을 마련한 왕이지요. 고구려 건국 후 400년 가까이 지났을 때입니다. 고대국가 기틀을 갖춘 최초의 국가 고구려가 수백 년이 지난 시점에서 왕권이 어느 정도 반석에 올랐을 때 무엇을 고민했을까 상상했어요. 당시 고구려 백성들은 전통적인 샤머니즘과 도교의 영향 아래 있지 않았을까요. 샤머니즘은 우리 민족의 뿌리라고 봐도 무리함이 없어요. 거슬러 올라가면 바이칼 호수의 알혼섬까지 가니까요. 우리 민족에게는 칠성신앙으로 나타나고 백성들에게 임금보다 강력한 영향을 주는 정신적 지주라고 봐야지요. 도교는 중국에서 왔다고 하지만 이미 오래전 산신령으로 현현(顯現; 명백하게 나타남)하여 백성들 마음에 깊이 박혀있었을 거예요. 기복과 무병장수를 벗어나 고귀한 ‘자비’와 ‘지혜’의 철학을 토대로 종교의 형식이 세련된 불교를 받아들인다는 건 백성들이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바탕을 바꿔버린다는 의미가 있지요. 불교가 일신교는 아니지만 부처님 개념으로 신적 존재가 통합되고, 이미 어느 정도 왕권이 확립된 상태에서 ‘우리의 임금’이 고귀한 부처님을 모신다면 백성들의 염원이 부처님께 닿기 위한 유일한 통로가 왕이 되는 게 아닐까요. 거기에 정치적 선전으로 왕즉불 사상을 적극적으로 선전선동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구요.

그렇게 보면 서양의 기독교도 같은 이치로 로마 국교가 돼요. 4세기라면 로마가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 후 페니키아 인들을 몰아내고 지중해를 장악하여 급속하게 발전한 지 수백 년이 지났을 때이지요. 황제의 위상도 이미 상당히 높아졌어요. 로마 12신을 비롯 수많은 신들을 믿고 따르는 다신교 국가의 로마에서 일신교 사상을 받아들이는 계기는 왕권강화에 있지 않겠어요. 이미 백성들은 예수의 부활과 복음을 목숨 걸고 따른다는 시대적 분위기도 있구요. 담덕에도 고구려 민간에서는 불교가 광범위하게 퍼져있다고 설명하잖아요. 로마나 고구려나 비슷한 배경이에요. 백제, 신라도 같은 이치가 작용했을 거고.

더구나 불교 사찰에 산식각, 칠성각, 독성각(묶어서 삼성각이라고 함)을 사찰 중심에서 약간 떨어져 별도로 짓고 따로 치성을 드리게 한 것은 로마에서 유일신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3위일체론(성부/성자/성신)을 개발한 것과 매우 유사해요. 기존 민간신앙이 신흥종교와 갈등하지 않되 새로운 국교(불교,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 가둬두는 효과가 있는 게 아닐까요.

이번 후기는 여러 날에 걸쳐 조금씩 썼어요. 그래서 글이 매끄럽지 않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잖아요.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자유롭게 끄집어 당겼어요. 아 문제가 있긴 있어요. 이번 후기는 쓰고 보니 독후감이나 읽기 모임 에세이가 아니라 역사 뇌피셜처럼 됐어요. 우리가 역사 공부하려고 모임을 하는 건 아니고 대하소설을 음미하려고 모인 건데 제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방향을 삐딱하게 잡았네요. 3권 읽기 후기는 문학 테마로 돌아가려고 해요. 우리 작가님 글빨이 힘차면서도 수려하지요.

그럼 내일 담덕 읽기 모임에서 만나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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