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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함께 읽기 세째날

대하소설 광개토태왕 담덕 읽기 모임 후기

by 박달나무

『광개토태왕 담덕』 3권 여명의 기운 읽기모임 후기

-울퉁불퉁한 역사의 입체성을 회복하다


지난 10월3일은 광개토태왕 담덕 읽기 모임 세 번째 날이었죠. 12명이 모여 담덕 3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빨간 날 휴일이고 단기 4358년 개천절이었습니다.

문득 개천절 노래를 떠올렸어요. 저는 한글날 노래와 개천절 노래를 혼동할 때가 있어요. 한글날 노래에 “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 가사가 있어서 그런 듯.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이게 개천절 노래지요.(1절만)

역사학자 정인보 선생이 노랫말을 지었어요. 우리 민족의 뿌리가 단군이라고 두 번 거푸 노래하고 있지요.

단군의 건국신화는 아득한 옛날이라서 고조선(원조선이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음) 자체가 신화 속 상상의 나라처럼 느끼는 정서가 일반적이지요. 하지만 소설 담덕 3권에 고구려 건국정신이 ‘다물’로 소개되지요. 엄 작가는 다물은 고구려 고유어를 한자 음차한 것으로 옛 고조선 영토를 회복한다는 뜻이라고 알려주셨어요. 철저히 제 뇌피셜이지만 ‘다’는 다시, 즉 again의 의미가 아닐까 싶고, ‘물’은 현재 우리가 쓰는 ‘물리다’ ‘물리치다’ ‘물러서다’의 공통점이 ‘제자리’ 뜻이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렇다면 다물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다’로 해석돼서 엄 작가 말씀과 겹친다고 봤어요.

고구려 사람들에게 단군 조선은 되돌아가야 할 자신의 뿌리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당연히 단군 조선의 역사나 영토 정보가 고구려 사람들에게 잘 전달됐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역사학계에서 고조선의 영토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부로 보는 견해에 논쟁이 있어요. 만약 고조선 전성기에 한반도 남쪽까지 영토였다면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이 한성을 함락하고 남한강 발원지 충주를 넘어 경상도 상주까지 남하한 것을 다물 정신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단군 조선 이전에도 한반도와 만주지역, 요동반도에 사람이 살았지만, 단군의 출현은 청동기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이주를 말하는 건 분명해요. 고조선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비파형동검이듯이 고대국가 형태의 권력 형성은 청동기 문명 덕분이겠지요.

저는 담덕을 읽으면서 이야기 속 인물들의 생각이나 말타기, 전쟁도구, 복식(服飾)문명, 불의 사용, 성 축조 기술, 조선(造船) 기술 등이 매우 세련됐다고 생각했어요. 담덕으로부터 천 년이 흐른 조선시대보다 뛰어나지 않을까 싶었죠. 소설가의 상상 속에서 1600년 전 세상이 과장되게 치장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어요.

이런 제 고정관념은 청동기보다 철기가 더 진보한 과학이고 실용성에도 앞선다는 생각과 겹쳐요. 과연 철기문명은 청동기문명보다 발전한 것일까 골똘히 생각해봤어요. 그런 점에서 담덕 읽기 모임의 열혈멤버인 흙내가마 박재국 대표에게 물었죠.

“토기는 있겠지만 고구려 사람들이 도기나 자기를 만들었을까요?”

“네. 삼국시대 도자기는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오래전 공주 무령왕릉 내부를 공개했을 때(지금은 내부 공개하지 않음) 무덤 안에 도자기 그릇이 있었지요. 설명에 의하면 6세기 초 중국 양나라(남조 시대)에서 수입한 그릇이라고 해요. 저는 왜 백제는 도자기 생산을 자체로 하지 못했을까 궁금했어요. 당시에 유약을 바른 도자기는 중국만 생산했다는 게 정설이죠. 하지만 그게 팩트일까, 지금까지도 의심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가 있어요. 단군 조선 시대에 만든 청동거울을 본 적이 있지요. 봤을 뿐만 아니라 직접 만지고 손톱으로 긁어도 봤어요.(물론 매우 살짝) 2500년 전 제작된 청동거울의 뒷면에 줄무늬가 엇갈리게 새겨져 있지요. 청동거울의 줄무늬는 1밀리미터 폭에 5개 줄이 들어있어요. 현대에서 재현하려고 거푸집을 만들다가 실패했고, 레이저 가공만이 가능하다고 해요. 과연 2500년 전 고조선 사람들은 0.2밀리 간격으로 줄을 배치하기 위해 어떻게 거푸집을 만든 것일까요. 아직도 구체적인 당시 기술을 밝히지 못했어요.

9년 전(2016년)에 경주 월지에서 발견된 금박 공예품(정식 이름은 선각단화쌍조문금박)은 1300년 전에 제작됐어요. 이 공예품은 미스테리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죠. 99.99% 순금 0.3그램을 0.04밀리미터 두께로 얇게 폈어요. 길이 3.6센티미터 폭 1.17밀리로 엄지손톱만한 크기에 두 마리 새와 꽃문양을 그려넣었어요. 현재에서 재현하려면 현미경이 필요하다고 해요. 세계에서 비슷한 예가 없다고 하구요. 과연 어떻게 그런 정밀한 세공이 가능했을까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천존고 1층 전시실에서 볼 수 있음)

전 세계에서 금관은 14개가 발견됐어요. 그중에 10개가 신라 왕관이지요.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을 해체한 후 금관 제작은 중단돼요. 금관 중단 직후 바로 위의 금박 공예품을 만들었다고 추정할 수 있어요. 신라 금관은 금함량 80~85% 정도인데, 99.99% 순금은 정련기술의 엄청난 수준을 말하는 거지요.

고고학의 새로운 발견으로 우리의 고정관념은 흔들리고 해체돼요. 현재가 과거보다 기술적으로 진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잘못됐어요. 5천 년 전에 사막에 피라미드를 150미터 높이로 만들었다고 ‘불가사의’로 표현하는 건 현대인의 오만이고 오해죠. 현대인이 고대 문명을 재현하지 못하는 경우처럼 당시의 사람들이 지금의 전자기기를 만들 수 없을 뿐이죠. 과거와 현재 사이에 시간적 차이가 계급의 우열 차이는 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소설 <광개토태왕 담덕>을 읽는 건 1600년 전 과거로 타임슬립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과거의 이야기로 현재를 은유한다는 것과도 결이 달라요. 이야기의 무대는 과거이지만 독자는 1600년 시간을 들락날락해야만 해요. “시간의 3차원을 인식하는 필수 도구”로 역사를 바라볼 때 역사소설은 울퉁불퉁한 인간의 모습을 2차원 평면이 아닌 제대로 된 3차원 입체로 인식하는 생각의 과정이 아닐까요. 찰라의 순간은 이미지로 제시할 수 있지만, 진실은 시간을 가지고 전개되는 이야기로만 드러나는 법이라 생각해요. 영화나 드라마도 이야기지만 연출자의 의도가 그대로 관객에게 파고 드는 반면 문학은 쓴 주체가 읽는 주체에게 해석과 감상의 주도권을 넘겨줬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지요.

얘기를 다시 담덕 소설로 되돌려야겠어요. 담덕 3권의 줄거리는 아래와 같아요.


담덕이 일곱 살 때 압록강 중류의 외가인 하가촌 무술도장으로 가서, 스승 을두미의 지도 아래 경서를 읽고 무술을 배우는 과정을 다룬다. 소수림왕이 지병으로 앓아누웠을 때, 드디어 해평을 고구려의 새로운 군주로 세우려는 연나부와 하대곤이 반역을 일으킨다. 이때 왕태제 이련과 계루부 출신의 국상 고계는 사전에 그들의 음모를 눈치 채고 쳐들어온 반역 세력을 물리친다. 끝내 반역에 실패한 해평은, 동부로 후퇴하는 길에 담덕을 죽이려고 하가촌 무술도장을 급습한다. 이때 을두미는 소년 호위무사 마동으로 하여금 담덕을 배에 태워 압록강에 띄우게 한 후, 자신은 해평의 무리들과 싸우다 끝내 쓰러진다.


370쪽 분량을 쉽게 읽을 수 있어요. 흥미진진, 박진감, 반전묘미, 최고몰입, 이런 낱말을 붙일 수 있는 드문 작품이죠. 저는 저절로 삼국지와 비교하게 돼요. 의도적이지 않지만 뇌에서 비교 작업을 하지요. 우리가 아는 삼국지 이야기는 사천성과 화북평야, 장강 이남의 중국 전역을 배경으로 3세기에 펼쳐진 이야기고, 담덕은 4세기부터 5세기에 걸친 동아시아 지역을 배경으로 펼쳐진 이야기라서 어느 정도 연관성은 있어요.

삼국지는 사건의 나열로 이야기를 진행시키지만 소설 『광개토태왕 담덕』은 글로 만든 상황 묘사가 그야말로 예술입니다. 독자가 글을 읽으면 머릿속에 실제상황이 그려지게 작가가 썼지요. 그림이든 사운드든 보거나 들었을 때 수용자(감상자)가 심상을 떠올리는 과정이 예술이라 할 수 있어요. 문장을 읽었는데 구체적인 이미지(心象)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문학으로서 가치는 없을 거예요.

또한 담덕에 중요한 메시지는 등장인물의 대사로 나타나요.

“백성이 하늘이다. 백성을 위하지 않는 대왕은 이미 그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내 어찌 하늘인 백성을 놔두고 백성의 뜻을 모른 체하는 대왕의 명을 따라야 한단 말이냐?” (p.14)

백제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왕이 흉년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데도 징병을 하여 고구려와 전쟁을 하려고 하자, 노회한 장군이자 최고의 백제 전략가인 목라근자가 아들에게 한 말이죠. 목라근자는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한 명도 징병하지 않고 버텼어요.

“임금도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니라 백성을 위하는 것이 어찌 역린이 되겠느냐?”(p.15)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가 임금의 명령에 맞서는 아버지를 걱정하자 목라근자가 한 말이에요. 오직 백성을 위한 결정만이 가치가 있다는 정치철학을 작가가 힘주어 말한다고 느꼈어요.

“고구려가 강성해지려면 바다를 장악해야 한다. 해양을 경영할 수 있어야 육지 경영도 수월해진다.”(p.90)

고구려 국사였다가 어린 담덕의 스승인 을두미가 제자 추수에게 한 말이지요. 추수는 말갈인으로서 백제와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은 무사였어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 스승 을두미의 명령에 따라 태백산(백두산)에서 벌목한 아름드리 나무를 압록강을 따라 운반하여 전진에게 파는 목재상을 하게 되지요. 목재를 운반하는 뗏목에서 해적의 공격을 받아 죽을 상황에 처했다가 꾀를 내어 해적을 무찌르고 탈출한 후 발해만과 황해를 장악하고 해상무역을 지배하는 일목(一目)장군이 되는 인물이에요. (*일목은 한쪽 눈이 없다는 뜻으로 스승 을두미가 지어준 닉네임)

소설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황해와 발해만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였다가 근초고왕 사후 바다에서 백제를 누르고 고구려가 바닷길을 장악하는 내용이 소개돼요. 이는 사료에 충실한 엄광용 작가의 각고의 노력으로 이루어낸 쾌거이지요. 중국의 역사자료와 광개토태왕릉비에 따르면 고조선의 기술을 이어받은 고구려의 조선술과 항해술은 높은 수준이었지요.

담덕 3권의 마지막은 11살 어린 담덕이 반란군 장수 해평의 공격을 피해 가까스로 배를 타고 압록강 물결을 따라 탈출해요. 이후 담덕이 서역까지 장사꾼을 따라가고 중국 장안과 산동으로 이동하여 다시 고구려로 돌아오는 성장 서사가 이어질 거예요. 영웅은 어떻게 고난을 이기고 성장하는지 다음 4권이 궁금할 수밖에 없어요.

담덕 읽기 모임 네 번 째 시간은 10월17일(금)이예요. 우리 모두 17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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