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기 힘든 사람들 옆에 더 있기 힘든 사람들만 있는 세상
집필 당시 30대 중후반인 도하타 가이토가 쓴 <있기 힘든 사람들>은 매우 특이한 에세이다. 난 에세이의 탈을 쓴 논문이라고 부르고 싶다. 처음엔 오해가 있었다.
(먼저 온라인 서점의 책소개를 옮긴다. “임상심리학자인 저자가 오키나와의 정신과 돌봄시설에서 조현병 환자들과 함께 지낸 4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철학, 사회학, 인류학, 심층심리학 등을 넘나들며 서술한 이 책은 학술서인 동시에 웃음과 감동과 통찰을 담아낸 에세이이기도 하다.”)
“의존은 인간에게 본질적인 행위다.”
이 문장을 책 초반에 보고, 제목과 연결지으며 ‘아하, 책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겠구나’짐작했다. 유명한 문구가 있잖은가. “사람은 의존할 수 있을 때 자립한 것이다” 이 문장을 (아마도) 야스토미 아유미 저서에서 봤고, 우치다 타츠루도 비슷한 말을 했고, 조한진희 외 여러분이 집필한 <돌봄이 돌보는 세계>에도 나왔던 기억이다.
그리고 문득 내 카톡 프로필이 떠올랐다. 나는 “같이 씁시다” 문구가 들어간 카카오프렌즈 라이언이 우산을 들고 있고 그 옆에 무지(토끼탈을 쓴 단무지)가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비를 피하려고 우산 밑에 들어있는 프사를 오래 전부터 쓰고 있었다. 자기 소개는 ‘돌봄노동자’라고 써놓았다.(최근에 낯이 화끈거려 ‘지구별여행자’라는 올드한 문구로 바꿨다. 서둘러 바꾸느라 가장 먼저 떠오른 낱말을 그냥 썼다. 그만큼 돌봄노동자 명패가 부끄러웠다.)
저자는 이 책의 주인공이 ‘돌봄’과 ‘치료’라고 한다. 학교 생활이 어려운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들을 10여 년 같이 살았던 기억을 돌봄이라고 혼자 우기던 엉터리 돌봄노동자의 진면목이 까발려질까봐 두려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으흠.... 서로 의존(의지)하는 사회가 건강하다는 말을 하려는 거지 뭐’
이런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다. 근데 도하타는 글을 재밌게 썼고, 독자와 밀당할 줄 알았다. 주제는 한강 소설만큼 엄중했지만 가벼운 르포 문학처럼 느꼈다. 심지어 미스터리 추리 소설 같다는 생각도 하며 줄줄 읽어나갔다.
그러다 난 몰이꾼에게 몰려 계곡 아래로 뛰어내려가다가 데굴데굴 구르는 토끼 꼴이 됐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사냥꾼에게 산 채로 잡힌 사냥감이 됐다.
저자는 “짠, 이런 결말은 좀 놀랍지!”하며 마지막 챕터를 썼지만, 나는 다음 문장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개인의 자립이 전제인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 맞아. 평생 ‘스스로’ ‘자립’ ‘서로’ 이런 낱말을 신봉했지. 한번도 의심하지 않고 말이지.
‘타의로’ ‘의존’ ‘일방적’ 일 수도 있잖은가. 그러나 그런 생각은 세상을 망치는 악마의 속삭임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의 현재 패러다임이 단지 ‘전제’된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거다.
그리고 두 번째 핵심은 다음의 문장이다.
애초에 마음에는 특효약이 없다. 시간이라는, 효과가 더디게 나타나는 만능약밖에 없다.(p.203)
이 말은 ‘자립이 전제인 사회’와 연결된다. 현재 우리가 딛고 선 세계는 시간을 제거했다. 시간의 역할을 잊도록 만들었다. 시간이 개입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선한 결과를 만들 수 없는데 말이다. 시간을 소거한 사회는 자본주의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언뜻 저자의 마지막 반전을 ‘혹시...’하며 예상하기 했다.
누름돌(오모시;p.269) 낱말이 획 지나가길래 반가웠다. 오모시는 내 어린 시절 엄마도 썼던 일본말이다. “오이지 담갔으니 냇가에 가서 오모시할 놈 좀 구해오너라” 이렇게 말씀하셨지. 오이지가 소금물 위로 떠오르면 공기와 닿아서 곰팡이가 핀다. 그러니 강돌로 눌러서 오이지가 떠오르지 않게 해야한다. 그건 억압이 아니다. 도하타는 자신이 근무한 돌봄센터의 고참 팀장을 누름돌 역할이라고 말했다. 흥분한 멤버를 달래는 것도 아니고, 꾸중하는 것도 아니고, 징치하는 것은 더욱 아니고.... 마땅한 표현이 없지만 ‘오모시’는 딱 맞는 표현이 아닌가.
중력으로 누르지 않고 오이지에 곰팡이 피지 않게 어찌 할 것인가. 그래서 오이에 방부제를 뿌리는 게 지금의 교육제도 아닌가. 그렇게 내 직업적 발상이 튀어나왔다. 돌봄센터에 등장하는 스텝과 멤버(돌봄 받는 조현병 환자들)들의 스토리는 내겐 제도학교 교실의 아이들 이야기로 모두 치환된다.
구조는 사람이 있기에 제 역할을 해낸다(p.286)
이 말도 마찬가지다. 보는(읽는) 순간 구조는 제도학교 교실로, 사람은 학생으로 바뀐다. 지금 교실은 학생이 없다. 제도학교의 구조는 자신의 행위가 세계를 바꾸는 경험이 원천적으로 박탈된 공간이다. 완벽한 의존의 삶을 사는 아기 조차 울면 입에 먹을 게 들어오고, 잼잼만 해도 주변이 환해지는 액팅의 결과를 얻을 수 있지만, 자립하라고 등 떠밀린 어린이청소년은 (어른도 마찬가지) 자신의 어떤 행위도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쇠목줄에 묶여 평생을 살다가 때가 되면 죽는 학대 강아지와 다를 게 뭐가 있는가(좀 표현이 ‘쎘’나. 인정한다. 좀 과했다)
돌봄은 상처 입히지 않는 것이다. (P.295) 반면, 정신치료의 목표는'욕구를 만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욕구를 바꾸는 것'입니다. (P.297)
이건 기억할 만하다. 하지만 돌봄 없이 치료 없다. 저자도 비슷한 말을 하며 힘을 준다.
결국 마지막 챕터에서 도하타는 회심의 미소가 아닌 똥씹은 표정으로 아래의 말을 뱉는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자본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매일 노동자나 경영자로서 생산성과 효율성을 추구 하고, 소비자로서 '가성비'를 따진다. 인류학자 매릴린 스트래선Marilyn Strathern은 이러한 세계의 양상을 회계감사 문화 audit culture 라고 불렀다. 온갖 것을 자본의 원리로 감사하는 세계다. 대학교, 병원, 중학교, 회사, 시청, 유치원 등 모든 곳의 회계가 투명하게 이루어진다.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도 그러지 않는가? 회사에서 볼펜 한 자루를 사는 데도 이유가 있어야 하고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 커피를 구입했다는 증거를 제출해야 하고 더 저렴한 인스턴트 커피를 사지 않은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p.348)
PDCA(Plan(계획)-Do(실행)-Check(점검/평가)-Act(개선/조치)의 4단계) 사이클이니 포트폴리오니 하는 낯선 외래어를 들먹이며 "그래도 괜찮을까?"를 스스로 묻게 만든다는 거다. 이미 디자인된 시회에 우리가 태어났고, 그런 자본의 요구가 당연시 될 때, 돌봄은 돌봄이 아닌 상거래에 불과하다는 저자의 절규가 들린다.
그리고 한마디로 ‘허무주의’로 정리한다.
그래서 나도 느낀다.
사는 게 허무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