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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Aug 04. 2017

박동섭 영화특강 후기(본문 2편)

커뮤니케이션에서 콘텐츠는 전달되지 않는다

  난 오랫동안 “말이 곧 행위”라는 해명에 곤란함을 지니고 있었다. 반은 알 것 같은데 나머지 반은 모르겠다. 문제는 모르는 반의 흐릿함에 있었다. 무엇을 모르겠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 답답함과 곤란함의 핵심이다. 행위는 신체가 있어야 가능한데 말의 본질은 공기의 파동일 테니 물리적 작용이 불가능할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행위로 풀어 말하는 것은 말이 행위의 메타포가 되거나 행위가 말의 메타포가 된다는 의미일 텐데, 그다음이 이어지지 않았다.
  이번에 박동섭 선생님의 영화 특강이 오랜 숙제를 해결해주었다. 그야말로 “대박”이다. 남들이 나의 대박 느낌을 공유하기란 쉽지 않다. 함께 답답함과 곤란함을 공유한 세월이 있어야 대박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글쓰기는 내 대박 느낌을 공유하겠다는 의지에서 나오지만 읽는 이가 어떤 경로로 내가 대박 느낌을 가졌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게 언어가 가진 본질이자 한계다. 

즉 내용을 전달할 수 없다는 한계가 없다면 언어도 아니다. 

한계가 곧 본질이니까 말이다.
  영화 <안녕하세요>와 박동섭 선생님의 해설이 비로소 나의 오해를 일깨워줬다. 내가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이제 오해의 실체를 깨달았기에 돈오(頓悟)가 가능하다. ‘悟’가 ‘깨달을 오’인데 心+吾(나 오)로 이루어졌다. 깨달음은 내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박동섭 선생님을 통해서 들은 아포리즘 중에서 “안다는 것은 행위의 사후적 정의다”를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그런데 사후적 정의가 내 마음속에서 주체적으로 홀로 이루어진다. 중요한 것은 앎의 이전 단계에서 행위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고, 행위는 매우 상호적이다. 
  내 오해는 말을 미디어나 메신저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파동인 물리적 성격의 말이 콘텐츠를 실어 나르는 매개라는 인식은 아주 오래됐다. 이게 오해였다. 말은 미디어지만 콘텐츠를 실어 나르는 것은 아니다. 말이 시니피앙일 뿐이다. 시니피에는 말에 없다. 수신자의 마음에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말이 시니피에를 직접 실어 나른다는 것이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오해였다. 콘텐츠를 버린 말만이 행위로써 에너지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사후적 정의는 수신자만이 홀로 할 수 있다. 발신자가 definition 과정에 개입하려고 할 때 쌍방의 관계는 어긋난다. 부모-자식 관계나 교사-학생 관계에 대입해보면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어긋남으로 당황했던가!
  <안녕하세요>와 박동섭 선생님의 강의로 얻은 새로운 깨달음이 또 다른 오해라고 해도 상관없다. 기존의 definition을 갱신하는 과정이 공부이며, 다양한 오해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미노루가 아빠에게 대들며 “어른들이야 말로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거잖아!”(41분~43분 사이)라고 할 때 벌떡 일어나게 됐다. 미노루와 미노루 아빠의 대화 속에서 말의 이중성에 대해 말하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대사는 이런저런 한 개념을 관객인 당신에게 주려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 저것은 이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닌가.’하고 내 마음에서 피어오른다. 내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은 자극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이 단순하지 않다. 미노루와 미노루 아빠의 대화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내 나름대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은 지난 세월 동안 나의 독서와 고민, 사색이 얽히고설킨 결과다. 
  얽히고설킨 타래가 없는 생각의 시원은 있을 수 없다. 타래의 패턴은 사람마다 다르니 결국 생각도 다를 것이다. 우리가 경계할 것은(또는 지향해야 할 것은) 다른 생각을 공격하는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경향성이다. 학교가 패턴의 획일화를 지향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강의를 듣기 전에 영화를 본 것만으로도 ‘쓸데없는’ 말이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적 행위라는 걸 알게 됐다. 부산으로 달려가 박동섭 선생님이 마련한 강의원고를 읽고 말씀을 직접 들으면서 생각은 더욱 선명해졌다. 다시 말하지만 ‘쓸데없는’ 말이 정말로 쓸데없다는 뜻이 아니며 시니피에*를 고려하지 않는 시니피앙**으로서 말을 고찰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니피에가 없는 시니피앙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다. 의미 없는 기호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AM과 달리 FM 라디오는 좌우 스테레오 사운드가 확연하게 들린다. 중파에 담을 수 없던 좌우 스테레오 소리가 초단파 FM에서는 한 번에 투 트랙을 실어 나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말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동시에 전달하는 매체라고 생각했었다. 
  말은 시니피앙을 전달하고 그에 대응하여 수신자의 마음에서 시니피에를 구성한다. 시니피에가 수신자의 마음에서 구성될 수 있는 것은 수신자에게 이미 구조화된 스키마(Schema)***가 있기 때문이다. 발신자는 말로써 스키마까지 함께 전달할 수 없다. 
  이마를 누르니 방귀 소리가 난다. 이 상황에서 소리를 듣는 현장의 구성원은 웃게 된다. 결코 화를 내거나 불쾌해하지 않는다. 발신자도 수신자도 이미 알고 있다. 방귀 소리를 들으면 모두가 즐거워지는 약속이 있는 것이다. 그 약속의 근원을 찾아 먼 여행을 할 필요는 없다. 한편 방귀를 뀌려다가 실수로 실물(?)이 나와 버리면 주변 사람들은 실물을 커뮤니케이션의 장에 내어 놓은 자를 놀리거나 비웃는다. ‘이마 누르면 방귀 소리 내기’ 게임의 법칙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스크린 밖에 있는 관객에게 웃음을 준다. 코우죠는 진정으로 곤란에 처했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관객이 어떤 이의 불행을 즐기는 악마성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기존의 약속과 어긋나는 행위는 약속 당사자 사이에서 곤란함(또는 고통)을 가져다주지만 그 상황을 높은 시좌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자에게 즐거움(또는 경각심)을 선사한다. 같은 시좌에서 타인의 곤란함을 즐거움으로 대하는 자는 악당이다. 시좌가 같을 때는 공감해야 한다. 곤란함을 나눠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을 높은 차원에서 조망할 수 있어야 한다. 지상에서 고통스러운 일이 천상에서 보면 코미디일 수 있다. 그래서 늘 날갯짓으로 날아올랐다가 먹이를 먹으러 땅으로 내려오는 반복적인 시도가 필요하다. 

  영화는 이런 메타 메시지를 위해 “오하요” 인사말을 내세웠다. “안녕하세요”를 통해 어떤 정보를 얻을 것인가. “날씨가 참 좋네요”도 같다. “어디 가세요?”는 질문이 아니고 “어디 좀 갑니다”도 대답이 아니다. 시니피에가 제거된 방귀 소리 같은 인사말들이 박동섭 선생님은 축복의 메시지라고 말한다. 새로운 깨달음과 함께 마음 따뜻해지는 해석이다.
  반대로 저주의 메시지가 있을 것인가? 욕을 퍼붓는다면 저주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저주의 메시지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축복의 메시지만이 바로 Social Action이고, 그로 인해 우리의 커뮤니티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저주의 메시지는 커뮤니티를 구성하기는커녕 기존의 커뮤니티를 파괴하는 Action이기에 지속 가능한 언어로 존재할 수 없다. 해체된 커뮤니티에서 더 이상 메시지의 존재 유무는 사고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99번 이상의 원소가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인공원소로서 실험실에서 잠깐 존재할 수 있지만 빠르게 붕괴해버리는 존재인 것처럼 사람의 커뮤니티가 존재한다는 것은 저주의 메시지가 결코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둘 이상이 만났을 때 우리가 어떤 말을 내뱉고 들을 수 있을까. 그것은 미노루가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축복의 격려들이다. 그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안녕하세요” 인사말을 내세웠다. 따라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코우죠의 실물을 씻어낸 속옷이 빨랫줄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닐까.
  인사말은 수신자가 같은 인사말을 반복한다는 원칙이 있다. 전 세계 모든 언어의 공통점이다. 발화는 시간의 차이를 두고 같은 발화를 끌어낸다. 서로 같은 인사말을 반복함으로써 너와 내가 우리가 된다는 확인 의식을 치른다. 그러므로 “Speech is social action"이 성립한다. (2016.8.28)


영화 출연인물들이 모여사는 도쿄 변두리 동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시니피에-의미, 즉 콘텐츠 

**시니피앙-기호, 기표, 약속된 사인(sign)

***스키마(Schema)-구조화된 배경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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