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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Aug 04. 2017

박동섭 영화특강 후기(본문1편)

말(言)이 왜 행위인가

  일본영화에 깊은 감동을 받은 일이 두 번 있었다. 밀레니엄 출범한지 얼마 안 지나서, 시간을 죽여야 하는 일이 있어 DVD방에서 우연히 보게 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이 하나다.
  포르노 장르라고 표기된 영화지만 하나도 야하지 않았다. 성기와 음모가 노출되는 장면이 있었음에도 전혀 흥분되지 않았다.(내 나이 혈기왕성할 때였다^^) 요정을 운영하는 부인 덕에 한량으로만 살아가는 남자 주인공은 점점 섹스에 중독된다. 


  단 한번 보여준 사내의 쓸쓸함은 중일전쟁을 배경으로 한 지식인의 무기력함이었다. 나에겐 그 한 장면이 너무도 강렬했다. 전장에서 청년들이 가랑잎처럼 스러져 갈 때 중년의 일본인 사내는 자신의 존재가 무거워 죽음으로 치닫는 섹스에 중독된다. 중일전쟁에 대한 묘사는 남자가 길에서 피는 담배 연기 뒤로 희미하게 행군하는 제국의 군인을 잠깐 보여주는 것으로 그친다. 탁월함이란 이럴 때 붙일 수 있겠거니 싶었다.
  타인의 몸과 섞지 않아도 오르가즘을 느낄 수가 있다. 어떤 전율. 그 전율에 대한 전두엽의 해석이 오르가즘을 구성한다. 남자의 담배 연기가 공기 중으로 확산하며 표류할 때 전율을 느끼고 전두엽을 통한 오르가즘을 느꼈던 것이다. 영화에 대한 무한 매력을 향유한 첫 경험이다.
  또 다른 하나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이다. 광화문 교보에 나갔다가 덤핑으로 파는(만원에 3장)DVD를 3만원어치 사왔는데, 그중의 하나였다. 거장이라지만 나는 이름을 몰랐던 구로사와 감독의 1950년 작품이라 보기 전 느낌은 ‘구닥다리’와 ‘한국전쟁’이었다. 1950 숫자를 보면 자동반응하는 한국전쟁은 체험 없는 강렬한 기억이다. 우리가 원시적인 전쟁으로 몸뚱이가 토막날 때 일본의 영화감독은 인식의 상대성을 다루는 스토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니.... 뭐 이런 대위법적인 멀티 씽킹~
  <라쇼몽>은 벌떡 일어난 것과 반대로 영화가 끝나도 일어나지지 않는 경험을 했다. 감독과 배우와 내가 원탁에 둘러 앉아 토론하다가 말문이 막힌 상태에 빠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자정에 문 닫는 도서관에서 마지막으로 빠져나오며 밤하늘 별을 본 느낌이랄까, 열심히 공부한 자신을 격려하듯 상쾌했다. 아이들을 만나는 선생을 하는 내게 감독과 배우가 말을 거는 느낌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감각의 제국>이나 <라쇼몽>은 우연히 본 영화였지만 <안녕하세요>는 ‘내가 이 영화를 잘근잘근 씹어줄게’라고 말하는 연구자의 사전예고를 받고 보는 작품이라 좀 긴장이 됐다. 그리고 다른 일본영화와 달리 벌떡 일어나지는 효과가 있었다.
  사실 박동섭 선생님이 거실에서 편하게 누워 감상하다가 영화 시작 얼마 후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는 에피소드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어느 부분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을까를 찾았다. 강의의 핵심이 “Speech is Social Action"이었기에, 박선생님은 아마도 영화 시작하고 5분 여 쯤 지나서 아역 중 하나인 코우죠(幸造)가 똥을 싼 것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벌떡 일어나지 않았을까 싶다. 첫 장면에 코우죠가 미션에 실패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미션 실패의 결과가 똥을 속옷에 지린 것을 알려면 5분 정도 지나야 한다. 

   『시네21』에서는 죽었다 깨나도 읽을 수 없는 박동섭 선생님의 탁월함이 이 지점에 있다. 첫 장면에 아이 네 명이 등굣길에 함께 걸어간다. 젠과 코우죠, 미노루 형제가 그들이다. 젠, 코우죠, 미노루는 검은 교복을 입었고 “This is a cat" 수준의 영어를 배우는 걸로 봐서 중학교 1학년이고 미노루의 동생 이사무는 초등1학년으로 보인다. 젠이 먼저 자신의 이마를 눌러보라고 한다. 미노루가 이마를 누르자 방귀 소리가 난다. 미노루 동생 이사무가 신기해하며 다시 누르자 다시 방귀 소리가 났다. 젠은 ”신기하지“하며 의기양양해 한다. 이번에 젠이 코우죠의 이미를 누르지만 코우죠에게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재차 눌렀을 때 코우죠가 인상을 쓴다. 그리고 코우죠는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고 나머지 3명만 학교로 향한다. 코우죠는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되돌아간다. 똥을 지렸기 때문이다. 
  박동섭 선생님은 이 장면을 곧바로 커뮤니케이션의 메타포로 읽은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양자 간에 동시 발화하지 않는다. 일종의 S(Stimulus)-R(Response) 작용 같은 것. 한 쪽이 발화하면 그걸 바탕으로 다른 쪽이 응답한다. 한쪽이 이마를 누르는 자극에 이마를 눌린 쪽은 응답을 하는 메커니즘이다. 이런 커뮤니케이션 메커니즘을 이 영화는 <안녕하세요(오하요)>라고 이름 지었다.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코우죠는 왜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그가 ‘소리’가 아니라 ‘실물’을 인사의 ‘컨텐츠’로 커뮤니케이션의 장에 내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 게임에서 ‘방귀’는 ‘방귀’가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시니피앙’이다. 다른 것은 모두 현실음이 사용되는 이 영화에서 ‘방귀’소리 만큼은 관악기에 의해서 표현되고 있다. (중략) ‘방귀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이마를 누르면’ ‘소리가 나는’ 응답의 즐거움만이 추구된다. 한쪽은 ‘이마를 누르는 자’이고 다른 한쪽은 ‘방귀로 응답하는 자’라는 사실이 아이들에게 싫증나지 않는 쾌락을 선사한다.(강의 원고 中)

  이마를 누르면 의미가 소거된 소리(방귀)로 대답해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실물(똥)을 내어놓았기 때문에 코우죠는 벌을 받고 퇴출된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은 커뮤니케이션이 정보 소통을 위한 상호작용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것이다. 하지만 잠시 숨을 고르고 생각해보면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일상의 대화는 정보를 실어 나르지 않는다. 내가 확보한 정보에 대한 긍정이나 부정의 반응을 상대방에게서 읽을 수 있을 뿐이다. 만약에 대화 채널을 통해 정보를 주려고 한다면 대화는 바로 깨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더 이상 “대화”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코우죠가 실물(박동섭 선생님의 표현이 탁월하다)을 내놓음으로써 대화의 장에서 탈락하게 된 것이란 해석이다. 충분히 동의한다. 이로써 말이 왜 행위가 되는지 선명해진 것이다. (2016.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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